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에, 또다시 옛날과 같이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돌아본다. 이 순간 내 맘에 와 꽂히는 말은 ‘양심’과 ‘내면의 소리’다. 나는 이 둘은 곧 진리의 말씀이라고 믿고 살고 싶다. 그런데 과연 나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이 소리를 듣고, 그것에 따라서 살았는가? 대답할 수가 없다.

나는 요사이 아주 훌륭한 미국의 퀘이커 존 울맨(John Woolman: 1720-1772)의 일기와 해리어트 베에처-스토우(Harriet Beecher-Stowe: 1811-1896)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있다. 하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일생동안의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는 일을 쓴 삶의 보고서다. 둘 다 당시에 심각했던 흑인 노예제에 대한 저항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노예들의 인간선언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 중 울맨의 이야기를 약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흑인 노예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옷을 재단하고 꿰매는 일을 하였다. 젊었던 어느 날 자기 주인이 소유하고 있는 흑인 노예판매증명서를 쓰라고 지시하였다. 그의 속 양심 또는 마음속의 소리는 그 흑인노예 판매증명서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쓰려니 너무 맘이 아팠다. 그래도 자기를 고용하고 있는 주인의 명령이기 때문에 거부하지 못하고 썼다. 그것이 그의 양심을 너무 강하게 때리고 눌렀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 주인의 명령이라는 것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노예증명서를 써 준 것을 몹시 뉘우쳤다. 그 뒤 어느 날 주변에 있는 한 사람이 찾아왔다. 유언장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때였다. 그 내용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흑인 노예들을 자기 자녀들에게 어떻게 유산으로 남긴다는 것이었다. 울맨은 고요히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에게 말했다. ‘저는 이 유언장을 대신 써드릴 수 없습니다. 제 속의 양심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가서 유언장을 쓰게 했다. 몇 년 뒤 그는 다시 울맨에게 왔다. 몇 년 전과 꼭 같은 내용의 유언장을 다시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울맨은 꼭 같은 말로 거절하였다. 그 뒤 얼마가 지나서 다시 그이가 울맨에게 왔다. 새로운 유언의 내용은 흑인노예에 대한 것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노예를 유산으로 남긴다는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이 때 울맨은 ‘제 양심과 속의 소리가 매우 기뻐하는 것을 느낍니다’ 면서 기꺼이 유언장을 대신 써주었다는 것이다. 그 뒤 그는 일생을 흑인노예해방을 위하여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친다. 그의 끈질긴 노력과 지극한 정성으로 1758년 말 필라델피아 퀘이커 연회에서 그 회에 속한 퀘이커들은 공식으로 노예를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결의를 하였다. 물론 그 한 사람의 노력만은 아니었지만, 마르지 않고 중단하지 않는 그의 노예해방 노력은 그렇게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그가 그 해방운동을 벌인 것은 아주 특이하다. 진리를 따르려 하면서도 흑인 노예를 소유하거나 사고파는 퀘이커들을 찾아가고, 퀘이커들의 모임을 찾아가서 깊은 명상과 침묵 뒤에 자신에게 들려오는 소리를 전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양심을 때리고 깨워서 링컨이 이끈 남북전쟁 100여 년 전에 놀라운 해방운동을 이룩한 것이다. 그의 건강은 언제나 아프고 허약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조용히 그러나 그칠 줄 모르는 불같은 열정으로 흑인노예해방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것은 바로 그가 듣는 양심의 소리요 내면의 소리를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진리에 사로잡힌 삶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흑인노예를 해방하기 위하여 진리와 사랑의 노예로 산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평가한다.
진리와 사랑의 노예.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 오늘날에는 매우 낯선 말이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물질과 권력과 영예와 성공을 좋은 삶의 덕목으로 삼는 오늘날, 진리와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삶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를 민감하게 듣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지고 살고 싶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회의원들이나 장관들 또는 온갖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이나 승진이나 영예를 위하여서라면 모든 양심을 다 팔고 덮어버리고 더럽게 살면서도 뻔뻔할 수 있는 찢어지고 굳어진 양심이 아니라 날카롭고 예민한 양심을 따르기 위하여 잠시라도 깊게 명상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하루에 한 번씩 가졌으면 좋겠다. 큰 기업을 이끌거나 중소기업을 가졌거나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도 이득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서 사는 사업이 어떤 것인가를 찾는 깊은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물론 고용살이 하는 사람들, 즉 직장에 취업이 되어 사는 노동자나 사무원들이나 모두 다 물질의 풍요와 승진의 안락을 넘어 속에서 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맞추어 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따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특히 젊고 어린 학생들이 오로지 출세와 상급학교 진학만을 위한 공부에 열중하는 대신 양심과 속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떤 경건하고 거룩한 시간을 잠시라도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지혜를 만나면 참 좋겠다. 한 사회를 공동으로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욕하던 것을 접고 잠시 내 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을 따져보는 양심의 소리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우리 사회가 양심의 소리, 내면의 소리를 따라 살아가는 문화가 형성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특히 이번 연말에 그런 시간을 아주 간절히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