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여러분의 도시는 몇 살인가요?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면 보통 500살은 기본이지요? 대전은 올해로 104살입니다. 1914년 처음으로 생긴 도시가 대전입니다. 그 전에는 그럼 도시가 없었냐구요? 대전은 없었습니다. 공주에 속한 그저 산 좋고 물 맑은 땅이었습니다. 무릉도원 같은 이곳에 “후사를 키우면서 남은 인생을 마무리 하겠다”며 우암 송시열 일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같은 은진송씨 동춘당 송준길도 이곳에 조용히 계셨습니다. 회덕현, 진잠현이 대전보다 먼저 있었던 근거지였습니다. 그 댁 후손이 송중기입니다.

이런 땅에 어느 날 갑자기 대도시가 만들어집니다. 이유는 기찻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1905년 경부선이 이곳을 지났습니다. 1914년에는 호남선이 만들어집니다. 드라마틱하게 교통의 중심이 되면서 근대도시 대전이 태어났습니다. 초기에는 신기하게도 조선 사람보다 일본인이 더 많았던 지역이었습니다. 기차와 관련해 전문가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모여들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거주민 반대없이 일본 주도로 도시를 만들어가는 게 신이 났을까요? 대전은 일제강점기,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32년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면서 이곳은 명실공히 중부권 최대도시가 됩니다. 전국 24개 부 중에서 17번 째로 큰 도시가 됩니다. 이런 청사진 덕분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대전은 근대건축물이 지천입니다.
그러나 군산, 목포, 인천, 대구, 서울, 부산, 포항이 근대건축으로 관광도시가 돼 갈 때 대전만 묵묵히 조용합니다. 누구는 부끄럽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대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 십기의 근대건축물이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것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들도 부끄러운 역사를 들어낼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뭐가 부끄러운 걸까요? 이렇게 무관심과 천대 속에 오늘도 근대건축물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800채에 달하던 근대건축은 겨우 십수 년만에 90%가 사라졌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전국에 세 개 있다는 동양척식회사는 변기, 타일가게이고 식산은행은 안경점입니다. 전국에서 유일한 철도관사촌은 곧 없어질지도 모릅니다. 아파트를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어쩌지요? 대전이 무관심 속에 가지고 있는 보물을 하나하나 던져버리고 있습니다. 성심당을 아세요? 대전보다 유명한 튀김소보로가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 생겨 대전 사람들의 간식이었고 언제나 나눔을 행하던 착한기업은 이제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하려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도 대전이 빵보다 유명한 도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은 대전 방문의 해입니다. 때에 맞춰 도지사관사 공관이 시민에게 돌아옵니다. 충남도청과 함께 도지사공관도 이사를 가서 그 안가가 이제 시민에게 열리게 됩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습니다. ‘테미오래’라는 예쁜 이름도 지어줬습니다. 대전의 근대건축물을 활용한 적극적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움을 벗고 지속가능한 대전의 보물이 돼 우리도 근대도시 타이틀을 걸고 ‘썬샤인 대전’을 만들어 가 봅니다. 역사가 지역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러나 대전은 신기할 만큼 역사에 묻지 않고 있습니다. 겨우 백 년 남짓에 5대 광역시로 자리잡은 대전의 힘이 대견합니다. 어느 순간에도 변화에 능동적인 대전이 역사에 묻고 세상에 답하며 백년을 넘어 천년으로 끌어가도록 우리는 이제 지난 역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제강점기 급속으로 발전한 것이 흠이라 한다면 ‘아픈 역사도 역사’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법고창신하는 군산처럼 대전도 아픈만큼 성숙한 근대도시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그 일환으로 대전의 근대건축물을 도란도란 소개해가고자 합니다. 자료가 많이 없고 인터뷰 자료도 충분하지 않아 어려운 과정이 되겠지만 내가 대전에 태어나 살아온 것이 또한 역사이니 두 발로 걷고, 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적용하고 가슴으로 쓰겠습니다. 그렇게 글을 보고 대전으로 오세요. 이곳은 대한민국의 허브, 대전입니다. 대전역부터 옛 충남도청까지 1.1㎞는 이제 대전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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