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 한남대 총동창회장, 전 대신고 교장

박영진

출근 시간이 가까우면 몰려드는 차량으로 인해 정체돼 답답하고, 끼어드는 운전자들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 일찍 나서면 자동차의 흐름이 원활해 기분이 상쾌하다. 겨울철이어서 아침 7시 반이 훨씬 지났는데도 이른 시간이라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이기에 차량이 많지 않아 거리는 비교적 한산하다. 방학 때는 학생들도 없는데 추운 아침부터 학교엘 가느냐고 걱정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못 들은 체 외면하고 집을 나셨다.

학교 주차장에 들어서니 아직 도착한 차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다가 그만 발길을 멈췄다. 정부 시책에 맞춰 절전을 하느라 토요일엔 엘리베이터를 운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그래서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5층에 있는 연구실 앞에 도착했다.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벽을 더듬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는데도 웬일인지 전등불이 켜지지 않았다. 몇 번씩 껐다 켜기를 반복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온풍기를 작동해 봐도 난방이 되지 않았다. 휴일에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이번 주부터 아예 관리실에서 전원 스위치를 내렸는지 아니면 고장으로 정전이 됐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학교까지 왔는데 그냥 발걸음을 돌리기도 멋쩍어 창가로 갔다.

밖을 내다보니, 잎사귀를 떨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그늘진 곳은 눈 이불을 덮은 채 아침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양지쪽에는 잎새들이 따사로운 햇살 아래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바깥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이맘 때면 친구들과 썰매를 만들어 방죽에서 타고 놀다가 메기를 잡고는(물에 빠진 것을 가리키는 말) 논두렁에 불을 붙이거나 떨어진 나무 잎새를 긁어모아 불을 지폈다. 작은 불씨에 여럿이 둘러앉아 불을 쬐며 언 손을 녹였다. 더러는 젖은 양말을 벗어 물기를 꼭 짠 뒤 손바닥에 끼워 말리다가 불똥이 떨어져 양말에 구멍을 만들기도 하고, 불장난하다가 뜨거운 불을 만지고는 얼얼한 손을 후후 불면서 깔깔대기도 했다.

밖에 나가 놀지 못하면 처마 밑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서서 고드름을 따다가 작은 것은 입속에 넣어 알사탕처럼 빨아 먹고, 기다란 것으론 친구들과 칼싸움 놀이를 하다가 다투던 일도 생각나 멋쩍게 웃었다.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다가 시계를 보니 아직도 9시가 되지 않았다. 이 시간에 도로 내려갈 수도 없어 온기가 없는 싸늘한 연구실에 앉아 창가에 비치는 햇살에 등을 맡긴 채 읽다가 접어둔 책을 펴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청승맞다고 구박할 터이지만, 딱히 갈 곳도 없고 아침부터 불러낼 친구를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책장을 넘겨봤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고 발과 무릎이 점점 시려 올라왔다. 그때 이희승 선생님의 수필 ‘딸깍발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 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란 이야기가 전하지마는,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딸깍발이’ 중에서-

차가운 연구실에 혼자 앉아 덜덜덜 떨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딸깍발이’를 떠올린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러다 감기에 걸리면 나만 손해다. 그렇지만 남자 체면에 금세 갈 수는 없고, 점심 때는 돼야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자존심이 세고 고집도 불통이며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 채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심리학 용어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The Bed of Procrustes)’는 자기의 기준이나 생각에 맞춰 타인의 생각을 바꾸려 하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집·독단을 가리킨다.

나 자신은 절대로 프로크루스테스가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책을 뒤척이기도 하고,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12시가 다 됐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고 의자에서 일어서자 몸은 뻣뻣하고 콧물이 찔꺽거리는 것이 오늘은 틀림없이 감기에 걸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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