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유적. 충남역사박물관 소장

팔송 윤황가에 전하는 ‘수행유적’은 윤황(1571~1639)이 1628년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관리의 민정을 감찰한 행적을 기록한 일기이다. 이 해 5월 9일부터 24일까지 16일간의 일기만 남아 있는데, 파견 기간이 5~8월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후의 일기는 결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일기는 특별히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없지만, 조선시대 암행어사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누구로부터 어떤 정보를 수집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5월 9일 사은숙배를 하고 도성을 떠난 윤황은 평안도 곳곳을 순찰하는데, 가는 곳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배에서 만나 사람들, 길가는 아낙, 늙은 여관주인, 관아의 노비, 교생, 아이들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수집한 정보는 수행원과 논의하면서 수행원이 수집한 정보와 대조하여 교차검증하였다. 정보의 내용은 관리들의 선정여부, 조세폐단, 법의 공정한 시행 등 다양했으며, 특히 백성들이 수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빠뜨리지 않았다.

이 일기에서 조금 흥미로운 사실은 윤황이 자신의 어사라는 신분이 자주 노출되어 정보수집에 어려움이 있었다는 점이다. 16일, 늙은 관노가 어사 신분을 눈치채는 바람에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으며, 18일 만난 노인과 교생은 그들이 곧바로 어사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수령의 칭송이 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수령을 장황하게 변론하기까지 했다고 썼다. 20일, 양백춘이라는 사람도 기밀을 알아채고 후하게 접대한 후 수령을 칭송했다. 21일에는 읍내 사람에게 신분이 들켜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고 썼다. 이 외에도 신분 탄로가 의심되는 기록이 많은데, 윤황이 만난 사람들이 자기 고을 관리의 선정 칭송하는 내용이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기록만으로 보자면 평안도 관리의 정사는 공정하고, 민생은 그리 곤궁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는 정묘호란이라는 큰 전쟁 직후로, 정국이 혼란할 뿐만 아니라 가뭄으로 민생의 피폐가 극심한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면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섣부른 추측은 보류하겠지만, 윤황이 자신의 암행어사 신분을 철저하게 감추지 못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미디어 탓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암행어사 박문수’나, ‘춘향전’의 이몽룡을 떠올려보자. 과거에 급제하고 암행어사로 남원 땅에 내려온 이몽룡은 도중에 농부를 만나 ‘원님은 노망이요, 아전은 주망이요, 죄인은 도망이요, 백성은 원망’이라는 사망(四亡)의 원성을 듣는다. 또 방자를 꾀어 춘향의 편지를 읽고서 변사도의 학정을 알아챈다. 적절한 변장과 연기로 농부들은 물론이고 방자도 이몽룡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정보를 취할 수 있었다. 변사도 생일잔치에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 …’는 시로 좌중을 혼비백산케 만들고, ‘암행어사 출두여~’를 외쳐, 끝내는 춘향과 해피엔딩을 이룬 것도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몽룡이나 윤황은 암행어사라는 비밀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이몽룡의 사례는 허구라 희화되고 극화된 면이 있겠으나, 여튼 철저한 기밀 유지로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실제 인물 윤황의 사례는 다소 허술한 자기 관리가 엿보이는 면이 있다. 이것이 현장의 리얼리티라면 할 말이 없겠으나, 암행어사의 감찰정보는 관리 평가인 포폄과 왕에게 보고하는 서계의 근간이 되어, 결국 민정으로 환원된다. 과도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암행어사 일기는 비밀업무 수행자의 자기 신분관리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장을연(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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