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바람 일고 고요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쓰나미가 밀려오다가 잔잔한 호수처럼 움직임이 없다가 온천지를 뒤엎어버리는 듯한 폭풍우가 내리 퍼붓기도 한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다가 봄비에 귀하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고 화려한 나비들이 현란한 날갯짓을 하기도 한다. 소쩍새의 피울음소리가 청아하리만큼 당당한 딱따구리의 나무 치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이것들은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단을 넘어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것들은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조절할 수 없는 영속하는 현상이다. 인간이 개발하고 연구한 그 어떤 과학과 기술로도, 또는 탁월한 정치와 행정으로도 이것을 변경할 수가 없다. 꽃피고 움트는 따뜻한 봄이 좋다고 늘 그런 계절이기를 바라고 꾸밀 수 없듯이, 푹푹 찌는 뜨거운 날이나 꽁꽁 얼어 숨 쉬는 김마저 금방 얼어버리는 듯한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날이 오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그 현상을 없앤다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임시방편으로 지나가는 재난 같은 무서운 것을 피할 뿐이다.

자연현상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사회현상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역사상에서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폭풍우나 지진이나 대홍수나 어마어마한 가뭄과 추위를 이겨보면 좋겠다는 맘으로 사회전체가 달라질 유토피아를 꿈꾸고 정치와 행정과 철학과 종교로 그런 세상이 올 것을 갈망하면서 지내왔지만, 그런 것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개개인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상당한 부분 옛날 유토피아라고 그렸던 그림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현실이 된 것이 참으로 많다. 그렇다면 그런 속에서 사람들은 만족하고 사는가? 불평과 불만이 없는가? 모든 정치와 행정과 학문과 철학과 종교들 역시 끊임없이 그 불평과 불만족스러움을 극복하려고 한결같이 노력한다. 이것이 문제인가 하여 해결하면 저기에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서 거대한 사건으로 터지고, 그것을 막으면 또 다른 곳이 툭 터져서 해결할 길을 찾는다. 해결할 문제들이 많이 중첩되어 흘러오는 데 결코 그것들을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다른 문제들이 장마 때 거대한 홍수처럼 밀려온다.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그러하다.

정치에 기대를 걸어보고, 행정에 맡겨보고, 과학과 기술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안 되고, 종교도 해결방법이 찾아지지 않고, 개인의 수양이나 도덕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태로 2018년이 지났다. 그 이전에도 그랬고 또 그 이전에도 그랬다. 2019년에도 그럴 것이다. 남북문제, 북미문제, 한미문제, 한일문제 따위, 또 외교문제와 국제무역문제가 또 중첩되고, 그 여파로 국내정치나 경제가 휘청거리고. 어떤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굉장한 권력과 맘으로 노력하는 듯이 보이지만, 막상 그 자리를 떠나면 자기가 한 말이나 주장한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간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야당이나 어떤 약자의 입장에 있을 때 바르게 주장하던 것들이 여당이 되거나 강자의 입장으로 바뀌어 앉으면 그저께 하던 주장들을 싹 씻어 날려버린 듯이 엉뚱한 짓을 한다. 공공한 일을 하는 존재나 사사로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그것은 다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끝도 없고 밑도 없이 남을 공격하고 남의 탓으로만 돌린다.

정말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제까지 보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당이나 다른 주장과 흐름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런 타자에게만 원망하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매어달리는 형상이다. 특별한 경우만을 제외하고, 정부나 국회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공공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사사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책임은 타자에 있고 내 손은 깨끗하다는 주장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것을 극복할 길은 전혀 없는 것인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 볼 겨를은 없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오고 또 온다면 그에 대하여 이렇게 궁금해 하고 걱정하는 것이 정상일까? 그렇게 바라는 것이 괜찮은 것인가? 그렇다고 가만히 오는 것만 기다리면서 살 수도 없다. 문명이란 것은 사실상 부질없는 그러한 것들에 때한 끊임없는, 그러나 별 효과가 없는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지 않을까? 우리 삶과 사회에서 춘풍추우 북풍한설 같은 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 그것 자체가 오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결코 어떤 한 두 사람이나 파당에 있지 않다는 것은 거절할 수 없는 일이다. 해결하려고 한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가만히 있다고 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속성을 여기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인가를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여 보려고 한다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런데 대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려고 한다. 이 부분이 극복되어야 할 일이다.

어차피 오는 재난이라면 모두가 힘을 합하여 원망 없이 원통하지 않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역시 함께 하는 일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가 함께 내 일이다, 내가 너와 함께 책임을 지는 일이다 하면서 나가면 좋겠다. 야당도 여당과 같이 공동의 책임주체이면서, 여당은 야당을 또 공동의 책임주체로 끌어안아야 한다. 공직자나 정년을 보장받는 사람들은 비정년자나 사설시설에 근무하면서도 같은 책임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노사 측 모두 공동주체가 되어야 하는 의식에 깊이 들어가야 한다. 당연히 시간수당이 정당하게 책정이 돼야 하고, 노동시간이 휴식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도록 해야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 없이 당연하다. 서로 적대관계가 상호보충관계, 상생관계라는 것을 일단 믿고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역시 가진 자, 힘이 있는 자, 권력자들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낮게 나가야 한다. <한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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