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칼럼]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태어나는 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를 다녔지만 재미는 없었다. 그래도 대학은 꼭 가고 싶었다. 그러나 넷째아들 학비를 댈 만큼 아버지는 넉넉지 않았다. 막노동을 해서 학비를 벌어보려 했지만 노예처럼 일해도 돈은 모이지 않았다.

고향 땅 영국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열 아홉살이 되자 스스로 선택해 캐나다로 넘어갔고 어렵게 돈을 벌어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수의학을 전공했는데 아주 재미있었다. 장학금을 타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다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소아마비가 와서 한쪽 팔과 다리를 못 쓰게 됐다. 그뒤 평생, 지팡이 신세를 져야했다. 그래도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다행히 결혼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지만 몸이 성치 않아 군대에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미안했다. 어느날 친구의 부탁으로 낯선 어느 나라에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을 굳히고 배에 올랐다.

그 남자는 F.W.스코필드였다. 운명처럼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다. 부인은 임신한 상태에서 극도로 몸이 나빠져 캐나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남기로 하고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위생학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영어로 가르쳤지만 흑독하게 공부해 곧 한국어로 가르칠 수 있었다. 이름도 석호필로 바꿨다.

도대체 무엇이 태어난 영국보다, 키워준 캐나다보다 조선을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곧 조선에서는 거국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석호필은 외국인이었기에 일본의 검문을 당하지 않았고 그 어떤 조선인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거국적이긴 했으나 역대급으로 끔직했다. 일본정부는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석호필은 카메라를 들었다. 기차를 타고 수원 제암리로 갔다. 그런데 삼엄한 감시망을 뚫을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자전거를 빌렸다. 제암리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논길을 달리고 산을 돌았다. 감시가 사라지자 다시 제암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땀범벅이 되고 흙에 뒹굴러서 외국인같지도 않았다. 백 리 길을 달렸다. 석호필은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를 쓸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왼쪽다리로 논두렁을 달린 것이다.

그렇게 제암리에 도착해보니 사진기 들 힘도 없을 만큼 처참했다. 울면서 그 험악한 상황을 사진에 담았다. 교회에 마을사람들을 무차별로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르다 울며 달려드는 사람들을 총으로 갈겨버렸다.

석호필의 필름은 다시 구두 뒷굽에 담겨 상해에 보내졌다. 그렇게 일본의 만행이 세계에 알려졌다. 석호필은 유관순을 찾아가 잔인하게 고문받던 서대문형무소 상황도 전했다. 그렇게 3·1운동의 모든 과정을 적으며 그도 모르게 조선사람이 돼 버렸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을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표현하며 “1919년 당시 젊은이와 늙은이들에게 진 커다란 빚을 잊지 마시오”라고 적었다.

일본은 석호필을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위험해진 건 세브란스의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석호필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눈치 보느라 아무도 출판해주지 않는 3·1운동 원고 298장은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사본을 제작, 세브란스병원 지하실에 묻었다. 자신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본을 들고 떠나면서 억장이 무너져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찾아간다. “조선인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따지고 나서 돌아섰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본국에 돌아가니 부인은 정신병에 걸려있고 아비 얼굴도 못보고 자란 아들은 네 살이 돼 있었다. 다시 일을 하며 가족을 보살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월급의 1/3을 저금하면서 조선으로 갈 날을 준비했다. 그리고 쉼없이 편지를 보내 동지들을 다독였다. 조국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석호필은 다시 한반도로 돌아왔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 사이 부인은 하늘로 떠났다.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다. 초청했던 이승만이 민주주의를 더럽히자 정면으로 맞섰다. 그렇게 자애로운 사람이 일본과 이승만 앞에선 금강역사처럼 덤벼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호랑이의 마음으로 조선을 지키는 자 ‘석호필’로 불렀다. 그는 그의 소원대로 이 땅에 누워 계신다. 억수로 운이 없어서 하필 찢어지게 당하던 조선에 들어와 온 인생을 버리고 참 한국인이 됐다. 한국인 석호필에게 이 글을 올린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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