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시조한담]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

맹자견 양혜왕 하신대 첫말씀에 인의로다
주문공 주의에 기 더욱 성의정심
우리는 성주 뫼와시니 알외 말삼 없어라

초장은 맹자의 양혜왕 장구상(梁惠王 章句上)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찾아보시니,

왕이 말하길, "선생(맹자)이 천리를 멀다 않고 이리 오셨으니, 또한 장차 내 나라를 어떻게 하면 이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길, "왕은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찾아뵈니 양나라 혜왕의 첫 말씀에 맹자는 인의라고 대답했다. 주희의 주석에도 그것은 더욱 참되고 정성스러운 뜻과 바른 마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세종대왕을 모시었으니 더는 아뢸 말씀이 없다는 얘기다. 김시습의 세종대왕에 대한 무한한 충성과 우러름이 이러하다는 얘기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이며 호는 매월당, 법호는 설잠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강릉이다. 그를 기인, 광인이라 하여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세종 1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종 24년 59세의 나이로 충청도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동으로 3살 때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우레 소리도 없는데 어인 천둥인가,
노란 구름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

5세 되던 해 김시습은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 들어가 중용과 대학을 배웠다. 하루는 재상 허조가 찾아와 ‘노(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보라고 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그 마음 늙지 않았네. 
老木開花心不老

기발한 착상이다. 노인을 노인이라 할 수 없어 ‘심불로(心不老)’로 칭찬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 소문을 듣고 승정원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해 시습의 시재를 알아보라고 했다. 박이창은 그를 무릎에 앉힌 채 시습의 이름을 부르며 물었다.

“아가야, 네 이름자를 가지고 글을 지을 수 있느냐?”
"올 때 포대기에 싸여온 김시습입니다. 來時襁褓金時習"

이렇게 응수했다. 세종은 박이창에게 다시 명했다. “동자의 학문은 마치 백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라는 구절로 김시습에게 댓구를 달아보라고 했다.

어진 임금님의 덕은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노는 것과 같습니다. 
聖主之德黃龍翻碧海之中 

박이창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세종은 기뻐하며 비단 50필을 하사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보고 싶으나 남이 들으면 놀랄까 두려우니,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함을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
김시습은 하사 받은 비단 50필의 비단 끝을 각각 이어 한쪽 끝을 허리에 차고 유유히 끌고와 대궐 밖을 나갔다. 그의 나이 5세,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은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애칭 ‘김오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는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는 서책을 불태웠다. 그리고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방랑하면서 평생을 방외인으로 살았다.

김시습은 다비를 하지 말고 절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3년 뒤 안장하려고 파보니 얼굴이 생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비를 거행해 유골을 모아 부도에 안치했고, 절 근처에 그의 부도가 있다. 저서로 ‘매월당집’, ‘금오신화’가 있다.

<중부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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