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이사장)

 철도 여행이 발전하면서 이젠 KTX를 타는 일이 보편화됐다. 새마을호, 무궁화호를 타기도 하지만 완행열차 비둘기호, 통일호는 사라졌다. 모든 역에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거점역 몇 군데만 서게 됐다. 기차여행에 관한 시들을 소개해 본다.

①속도를 얻어 풍경을 잃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시간 30분, KTX 고속열차의 등장은 속도 지향의 결정적 승리다. 한 마리의 누에처럼 단단하게 웅크린 모양을 하고 고속열차는 공기를 찢으며 달려간다. 오직 서울과 부산이라는 두 목표물만을 향해 돌진하는 이 속도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그저 달려가는 속도의 이미지뿐, 길은 직선으로만 향하고 그 직선 위에는 풍경이 머물지 않는다. 속도를 얻고 풍경을 잃어버린 세대, 그 시대에 다시 길의 의미를 묻는다.

②삶도 길도 곡선으로 완성된다: 오래된 지도 한 장을 편다. 크지도 않은 땅 덩이에 삼팔선까지 드리운 안쓰럽고 슬픈 국토가 그 위에 있다. 그 슬픔의 낱낱을 이어 붙여 가며 봉합하기라도 하듯 국토의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가며 기다랗게 이어지는 곡선들, 그 곡선들 구비마다에 수많은 사평역들이 있다. 간이역, 그곳은 국토의 살 속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다. 삶은 그 굽은 길 속마다에 촘촘하게 박혀 있으니, 간이역은 또 그 촘촘하게 박힌 세상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삶과 삶이 이어지며 굽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며 완성된 곡선들, 삶이 만들어낸 길이다. 직선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깊고도 깊다란 세상, 그 국토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

③간이역 하나가 사라질 때 삶 하나가 사라진다: 가은, 미륵, 산양, 상색, 야음, 소래, 미양. 사라진 간이역들의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지난 20-30년 사이에 100여 개의 간이역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수많은 지선으로 이어지던 가은선, 김포선, 수려선, 수인선, 안성선 등이 폐선됐다. 그리고 더 많은 지선과 간이역들이 지금도 사라져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길은 자로 잰 듯 곧고 바르게 직선으로 펴지려고만 하고, 그 직선 아래 박힌 삶들은 하나둘씩 직선 밖으로 밀려난다. 세상의 모든 간이역들이 사라지면, 세상은 더 빨라질까? 그 빠름 속에서 세상은 점점 더 스쳐가는 바깥이 되어간다. 바깥은 바깥일 뿐, 영원히 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게 모든 이가 타인으로 고립되는 자본의 시대가 완성된다. 고립된 자아만이 존재하는 세상, 그곳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을 묻는다.

④작고 초라해지는 삶의 한 순간에 간이역이 있다: 간이역이라는 낱말은 삶의 본질을 가르는 하나의 상징이다. 길 위에서의 갈등, 돌아서는 회한, 인생의 머뭇거림, 작은 길로 들어서는 연민 같은 것들이 ‘간이역’이라는 하나의 낱말에 모두 담겨 있다. 간이역은 직선의 세상, 그 크고 빠른 세상의 이면에 깃든 모든 작고 초라한 것들의 상징이다. 세상 어느 삶인들 어느 한 순간 작고 초라해지지 않는 삶이 있었던가. 그 고비에서 우리는 늘 하나의 간이역을 만난다. 작고 초라해진 삶의 한 순간을 위로하듯, 그곳에서는 늘 작고 초라한 삶들이 눈인사를 건네 온다. 그 말 없는 연대 속에서 삶은 또 하나의 간이역을 넘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구불구불한 삶의 곡선도 완성되어 간다. 그 곡선 위에서 언제까지나 직선으로만 달릴 것 같은 세상의 오만을 응시한다.

⑤멈춰보기: 삶의 길이는 그곳에서만 가까스로 허락된다. 사진은 언제나 그 순간에 멈춰있다. 그 멈춰있음으로 하여 사진은 영원히 그 순간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사진을 볼 때 우리가 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 속에 담긴 그 이야기를 본다. 기억의 증거처럼 사진은 그렇게 멈춰 서서 사라진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사진은 움직임을 거부함으로써 이야기를 품고 그 멈추어 선 순간의 깊이를 더한다. 움직이는 영상이 스쳐 보낸 그 낱낱의 순간들을 정지 화면으로 붙들어 잡을 때, 세상의 속도는 잠시 호흡을 한다. 이제, 사라지거나 사라져 갈 간이역들을 하나의 정지된 화면으로 잠시 멈춰지는 곳에서 잊어진 호흡법을 다시 배운다.(‘영원한 자유인’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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