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칼럼] 추위
[금강칼럼] 추위
  • 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 승인 2019.01.09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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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겨울은 추운 것이 좋았다. // 강마다 쩌억 쩍 빙하같은 얼음이 얼고 / 세찬 바람에 절로 겸손해지는 사람들 / 웅크리고 종종걸음 치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 눈 내리고 길 얼어붙어 / 세상천지 오도 가도 못하고 유배되어도 / 꿩 사냥에 노루잡이가 신나던 유년을 / 추억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 뜨뜻한 아랫목을 내어주던 인정도 그리웠다. // 엄동설한을 전쟁이라도 치르듯이 / 생과 사를 무시로 오가는 사람들이 / 우리 이웃이며 동지들이라는 것을 / 깨닫기 전까지는, / 인간의 겨우살이가 동물의 세계보다 더 잔인하며 / 등 기대어 온기를 나눌 수도 없다는 것을 / 누군가 나에게 깨우쳐주기 전까지는.

겨울이 오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이렇게 글로 써본 적이 있다. 산간벽지 화전민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추억은 주로 겨울이 많다. 개천에 얼음이 얼면 누가 더 깊은 곳까지 가는지 겨루다가 물에 빠져 꽁꽁 얼기도 했다. 길을 잃고 마을로 내려온 노루를 아이들이 떼지어 몰아세워 사로잡기도 했다. 그 날 밤 엄마들이 모여 끓여주었던 노루 고기로 만든 국은 질기고 누린내가 났다. 눈이 거듭 내리고 쌓여서 평평하고 푹신한 놀이터가 되어주었던 밭에서 종일 뒹굴면서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즐거웠다.

도시에 나와 살면서부터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세상살이가 그만큼 경황없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 겨울철 평균 기온이 대체로 상승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도시의 거대한 방한 시스템이 바깥 추위에서 우리를 차단하고 있기 때문에 뼛속 깊이 스며드는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집에서 나서면 난방장치 잘 갖춘 대중교통이 우리를 일터로 데려다 준다. 차디찬 영하의 날씨에 그대로 나설 때도 거위털 패딩과 송아지 가죽 장갑으로 단단히 무장하여 추위가 침입할 길을 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삶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겨울은 추억의 계절이 아니라 혹독한 현실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작년 여름의 지독한 폭염보다 이 겨울의 추위가 훨씬 더 견디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자녀 둘과 함께 사는 어느 지체 장애인 가족에게 정부가 지원하는 난방비는 7개월간 14만 5000원이라고 했다. 돈이 부족해서 추운 겨울에도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산다. 농촌의 컨테이너에서 홀로 겨울을 나는 87살 할머니가 받는 난방비 지원금은 8만 6000원, 기름 보일러를 보름 정도 가동할 수 있는 금액이다. 최근에 티비 뉴스가 전한 우리 이웃의 겨울 풍경이다.

파인텍 노동자들의 굴뚝 농성 423일째인 8일 오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홍종원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과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조현철 신부 등이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굴뚝 농성장으로 오르고 있다. 이날 굴뚝에 오른 의료진과 성직자들은 지난 6일부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홍기탁, 박준호 조합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단식이라도 중단할 것을 설득했다. 연합뉴스
파인텍 노동자들의 굴뚝 농성 423일째인 8일 오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홍종원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과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조현철 신부 등이 서울 양천구 서울에너지공사 굴뚝 농성장으로 오르고 있다. 이날 굴뚝에 오른 의료진과 성직자들은 지난 6일부터 무기한 단식에 돌입한 홍기탁, 박준호 조합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단식이라도 중단할 것을 설득했다. 연합뉴스

전쟁일 수밖에 없는 빈민들의 겨울나기도 가슴 아프지만, 생존권을 지키려고 전쟁터로 뛰어든 사람들 이야기는 내 평범한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서울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 올라 420일이 넘도록 고용 승계를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두 노동자는 이 매서운 추위 속에 물과 효소마저 아예 끊고 무기한 단식을 하고 있다. 전주시청 앞 25m 조명탑 꼭대기에는 2017년 가을부터 500일 가까이 사납금제 폐지를 외치며 홀로 싸우고 있는 택시 노동자가 있다. 노동조합 관련 해직 공무원들의 원직복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청와대 앞 노숙농성도 새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밤 사이 기온이 영하 10도까지 떨어졌다고 아침 뉴스가 전한다. 평소보다 더 두터운 옷을 챙기면서 평범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가 추위를 잊을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집과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것은 일부에게만 선택적으로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는 누구나 누려야 하는 보편적 권리라는 것을.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몇 달간 촛불을 드는 것보다 더 길고 힘든 싸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우리가 마음 열고 이웃 살피며 가진 것 서로 나누면 외진 곳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억울한 죽음들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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