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람노릇하면서 살고 싶네
그렇게 살고 싶네
사랑하며 살고 싶네

수많은 사람들이 왜(why)가 아닌 어떻게(how)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논리는 사라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방법론적 고민이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방법보다 방향이 먼저인 사람은 혼돈 속에 숨어 있는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경제가, 경제시스템의 뿌리가 흔들리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자본주의적인 현 시스템이 실상은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와 투자를 주관하는 경제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스템이 아니라 ‘보이는 손’에 의한 통제 자본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프랭크 나이트는 “시장 경제주의 사회의 불안정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현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현상이다. 원활한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정치 시스템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 문제의 근원은 경제 구조의 붕괴가 아닌 도덕의 붕괴에 있다”라고 일찍이 갈파(喝破)했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저급한 보편주의와 평등주의에 매몰되고 있다. 보편적으로 조망되고 입증돼야 하는 논리의 객관성을 무시하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으로 취급하는 지도층의 주관적 논리가, 또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처럼 방향 감각을 상실한 지도자의 논리 부재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러한 논리의 퇴보 현상은 인본중심적인 다원주의가 확산되면서 가속화됐다.

다원주의란, 시대적 패러다임의 흐름 속에서 묘하게 뒤틀리고 변질된 결과로 태어난 사회적 변종 이념이다. 보편주의와 평등주의가 민주주의의 1차 변종이라면, 다원주의는 2차 변종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새로운 철학의 등장으로 “너는 네 생각이 있듯이 나도 내 생각이 있다” 혹은 “너는 네 식대로 살아라.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라는 식의 저급한 보편주의를 잉태했다. 그 결과 본래 다양성을 의미하는 다원주의가 본연의 취지에서 벗어나 진리 여부와 무관한 모든 주관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하게 된 것이다.

방법보다는 방향이 먼저다. 목적이나 사명이 방법을 이끌어 가야지 방법이 목적을 사명을 이끌고 가선 안 된다. 동기나 목적이 선한 것이라면 방법 또한 선한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가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려 하는 경향이 있고, ‘내로남불’ 하는 습성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완성해야지, 사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해선 안 된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끝이 달라진다. 결국은 이단(異端)이 된다. 목적에 맞는 동기에 부합한 방법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을 우리는 대장부(大丈夫), 즉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나는 오늘도 사람답게 사는, 사람다운 사람이, 사람노릇하며 살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논어의 안연 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 臣臣, 父父, 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했다. “임금은 임금 노릇 하며, 신하는 신하 노릇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 하며, 자식은 자식 노릇 하는 것입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만일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며,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며,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우리들이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인즉 임금은 임금답게 나라를 편안히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올바른 정책을 내놓으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모범을 보이고, 아들은 아들로서 책임을 다한다면 나라가 어찌 안정되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라는 의미다.

본분에 최선을 다하기 어려운 다양한 시대상 때문일까? “철학이 지배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 원했듯이 철학자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면 제왕이 철학을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어느 쪽도 꺼림칙하긴 마찬가지다.

철학이 지배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즉 철학자가 철학자로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철학자는 정치가이거나 교육자이거나 과학자이거나 한 적은 있지만 철학자인 것은 포기했다”라고 말한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의 말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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