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순 배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이영순 배재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지난 연말을 미국에서 보냈다. 추수감사절부터 크리스마스와 신정 연휴를 보냈으니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을 보내고 온 셈이다. 겨울임에도 눈 구경은커녕 초여름 날씨처럼 따뜻한 날들이 이어지는 곳이니 크리스마스라고 해야 별게 있으랴 싶었는데 웬걸, 실물크기의 사슴과 마차, 산타클로스, 수백 개의 전구들로 대낮처럼 밝혀 놓은 밤풍경이 동화 속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수선을 피우는 광경이 처음도 아닌데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놀이동산처럼 꾸며놓은 미국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처음 본 것은 2000년 겨울이었다. 전기세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는 듯 밤새도록 불을 밝힌 풍경 앞에서 부도위기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 나라의 궁핍함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었다. 한 푼의 달러를 긁어모으기 위해 국민의 보잘 것 없는 장롱 속까지 뒤져야 했고 형광등 하나를 밝히는 것조차 망설여지던 그 때, 요지경처럼 펼쳐진 화려함이 부럽기만 했었다. 그런데 더욱 화려해진 크리스마스 풍경 앞에서도 어쩐 일인지 부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정도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내 나라 살림이 풍족해진 탓은 아닐 것이다. 부도위기의 산을 넘었다고는 하나 내 나라 살림은 여전히 높은 실업률에 고통스럽고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야만 기본생존권이 보장되는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나니까.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흡사 기념일을 위해 사는 나라처럼 보일 때가 많다. 새해 첫 달을 시작으로 밸런타인, 이스터, 페어런스 데이, 인디펜더스 데이, 할로윈, 쌩스기빙, 크리스마스에 이르기까지 무슨 기념일들이 그리도 많은지. 그 많은 기념일에 맞춰 미국인들은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대수롭지도 않은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화려한 이벤트를 벌이는 모습에 애처로움까지 느껴지는 것은 나이 탓도, 그 뒤에 숨어 있을 교묘한 상술에 대한 반감 탓도 아닌 듯하다. 그토록 열성적으로 기념일을 챙기는 모습들이 삶의 권태와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느 곳이든 사람이 붐비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운 나라에 살다보니 대낮에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단지의 그 드넓음이 낯설기만 하다. 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저녁 무렵이나 주말에도 인적이 드물긴 마찬가지다. 이따금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몇몇 사람 외에는 불 켜진 창문에서조차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주택단지가 쓸쓸하다 못해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미국에서 살 때는 정해놓은 규칙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고발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길에서 마주치는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상냥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지만 그들 얼굴에서 속마음이나 감정의 흔적조차 읽어내기 어렵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미리 약속이 돼 있지 않으면 이웃집 나들이는 어림도 없다. 남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여 잔디관리를 소홀히 한다거나 집밖에서 아이들만 놀게 했다간 누군가의 고발로 경찰이 들이닥치기 십상이다. 누군가가 숨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생각해 보라. 모골이 송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라고 자랑스럽게 펼쳐 놓은 그들의 화려한 모습이 전혀 부럽지가 않은 것일 게다.

공들여 마련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하나 둘 해체될 무렵 적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을 떠나 내 나라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 들어선 순간 마치 무균 처리된 병실을 빠져나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 상냥한 인사말은커녕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부딪쳐 놓고도 미안한 기색조차 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나는 그 어수선함이 사람 사는 세상처럼 여겨졌고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몸짓에서 삶의 열기를 느꼈다. 누군가 바닥에 세워 놓은 캐리어를 넘어뜨리고 지나간다. 넋을 놓고 있다가 불쑥 “아임 쏘리”를 외친다. 가방을 넘어뜨린 건 내가 아닌 그였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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