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 초상화.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2019년의 설날이 머지 않았다. 매년 명절만 되면 주요 언론에서 보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제사’이다. 제사 상차림의 방식부터 제사상 평균 비용, 제례의 존치 논쟁까지 제사에 대한 다양한 보도가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교문화의 장구한 역사가 우리 삶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인문주의 즉, 유교의 원형을 만든 공자는 ‘사람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삶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며 신(神)에 대한 제자의 물음에 즉답을 피했다. 그러나 유교 사상의 근원인 ‘효’와 조상신이 연계되면서 제례는 중요한 일상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려 말 주희의 ‘주자가례’가 수용되면서 유교식 제례가 시행되었고,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국시로 삼으면서 제례는 제도화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문무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서인들은 부모만 제사를 지내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주자가례’의 보급과 예학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상신을 숭배하는 과정에서 초상화가 제작되었다. 그렇다고 조선전기부터 초상화가 널리 사용된 것은 아니다. 유학자들은 초상화의 기원이 불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초상화 숭배에 비판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숭배를 위해 초상화를 사용하는 것이 관습화되었고,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초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관복차림의 반신상 혹은 전신상의 관료초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조선후기 기호유학 근거지, 특히 노론 소론의 본향인 충청남도에는 관료나 유학자의 초상화가 다수 소장되어 있다. 충청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건립된 공주 충현서원에는 9점의 주자 초상, 논산시 충헌사에는 청주양씨의 시조 양기 초상, 명재 고택에는 윤증 초상, 아산 만전당에는 홍가신 초상, 홍성 정충사에는 임득의 초상 등이 있다. 초상화가 당대 저명한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충청도에 산재한 초상화는 충청유교를 대표하는 문화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충청유교문화원 건립이 가시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초상화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확산시키는 한편 충청유교의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데 일조할 것이다. 문광균(충남역사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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