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을 대동하는 혼인잔치였다 보니 호화찬란한 예식들이 거행되었다. 이런 여인들은 많은 지참금을 몸에 감고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갔으나, 처음엔 영 적응을 잘 못하고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왕족이나 귀족이 아닌 장사로 돈을 번 신흥부자들의 딸들이었다보니, 때론 본인이 이런 전통왕실에 적응을 잘 못하고, 왕실인들은 이들을 무시했다는 재미있는 얘기들도 남아있다. 아무리 돈이 철철 넘치는 부자라 할지라도 전통왕실을 상대하기에는 조금은 힘겨운 부분들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듯이, 이렇게 떵떵거리던 메디치家도 17세기 말부터는 서서히 기울어져 간다.

이 글에서는 먼저 대공 코시모의 얘기를, 그의 자식들인 첫째 아들 페르디난도(Ferdinando), 둘째 딸 안나 마리아, 그 중간에 잠시 코시모의 남동생 얘기를 하고선 마지막으로 막내아들이자 메디치가의 마지막 대공이었던 기안 가스토네(Gian Gastone)의 얘기들을 옮겨본다.

아버지 페르니난트(Ferdinand)와 그의 아들 대공 코시모 3세(Cosimo)의 이야기다. 대공 코시모는 1670~1723년 자그마치 53년간 이 공화국을 다스렸다. 이 시기는 특별히 좋은 것도 특별히 나쁠 것도 없었던 좀 덤덤한 시대였다고나 할까? 이미 경제적인 능력이 기울어져 떵떵거리던 제1의 세력이 아닌 제3의 세력으로 전락했던 터고, 거기다 군대의 힘도 약해져 있었다. 코시모 3세는 엄마로부터 아주 신심 깊은 종교교육을 받았는데, 그 신앙심이 너무나 투철한 나머지 하루에도 성당을 대 여섯 번 드나들면서 기도를 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누리는 최고의 가치는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하니 어느 정도의 신앙심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1621년부터 1670년까지 정권을 잡았던 코시모의 아버지 페르디난트(Ferdinand)는 코시모 어머니와 별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에다가 자식들에게까지 별 내리사랑을 쏟지 못했다보니 코시모 3세 같은 경우는 결코 웃는 일이 없었을 정도의 우울한 삶을 살았다 한다.

아무튼 이렇게 너무나 경건한 믿음과 신앙을 가진 코시모 3세는 다른 이들에게도 철저하게 이 종교적인 잣대를 갖다 대었다. 그 예로서, 그는 플로렌즈에서 사는 모든 배우들을 쫓아내는 가하면, 결혼 안 한 여자들이 사는 집에는 남자들의 출입을 금지시킬 정도였다는데, 여기에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혹 귀족여인들만 사는 집이 아니었을까하고 짐작해 본다. 그리고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도 심했다. 이런 차별주의는 그가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다 보니 이 종교에서 제시한 대로 따르는 믿음에서 나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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