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윤 배재대 간호학과 교수

안성윤 배재대 간호학과 교수

유년시절, 나는 어린이라면 응당 9시면 자야한다 믿었고 밤에 대문 밖을 나가면 도둑과 귀신이 우글거리는 줄 알았다. 밤 11시의 밖이란 엄마가 있을 때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살짝 엿보았다가 재빨리 닫아야하는 무서운 세계였다. 어쩌다 동생들이 일찍 잠들고 뜨개질하는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는 날은 정말 특별한 밤을 선물 받은 날이었다. 그런 밤조차도 TV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당연한 밤의 고요함이 있었다. 오직 성탄절 밤에만 어른들은 친척들과 모여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고 어린이들은 산타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자야하는 불면의 고통을 맛봤다.

신이 인간에게 가진 의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버리고 다시 이를 되찾기 위해 그렇게 번 돈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대낮 같은 환한 밤을 얻은 후에 칠흑 같은 밤을 잃었고, 그래서 칠흑 같은 밤이 품고 있는 환상과 이야기들이 저절로 사라졌다. 밤의 무서움, 밤새 있는 줄 알았던 도둑들, 그리고 바쁘게 업무를 보던 귀신들이 전부 사라졌다. 텔레비전과 스마트폰 덕분에 바닥이나 벽지 무늬를 바라보며 조합을 거듭하는 지루함의 고통은 벗어났지만 대신 평온함이 사라졌다.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은 것은 무엇인가. 안델센의 동화에서 인어공주가 왕자님을 만날 ‘인간의 다리’를 얻기 위해 가볍게 포기했던 ‘목소리’가 알고 보니 목숨을 바쳐야할 정도의 지나치게 큰 대가였음이 밝혀졌다. 인어공주는 당연하게 여겼던 목소리의 가치를 잘 몰랐다. 나는 9시면 당연히 잠자리에 들었던 삶을 간단히 잃어버렸다. 더불어 고통 없이 저절로 잠이 깨는 상쾌한 아침도 잃어버렸다. 유년시절의 아침 기상은 그저 생활이었지 부지런하거나 게으르다는 평가를 받을 일이 아니었다. 밤이 주어졌으므로 아침도 즐길 수 있는 보통의 평범한 생활이었다.

지금은 그 때 가졌던 밤의 두려움조차 달콤하다. 유년시절 밤의 이미지 가운데 지금도 유지되는 것이 얼마 없기 때문이다. 밤이 더 무서운 세계였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밤을 정복할 생각을 못하고 내버려뒀을텐데 재미있게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9시면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던, 11시 넘어서는 바깥세상을 엿볼 엄두도 못 냈던 그 당시의 삶을 그리워한다.

원숭이는 바나나와 자루 하나면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원숭이가 입구 좁은 자루 속에 들어있는 바나나를 쥐었을 때, 손에 쥔 바나나를 놓으면 사람한테 잡히지 않고 달아날 수 있다. 그러나 원숭이는 원하는 것에 종속돼 정작 가장 소중한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만다. 갈망하는 ‘가치’를 얻음으로써, 제일 소중한 ‘가치 없는 상태’를 잃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치 없는 상태’가 덤으로 제공했었던 당연한 것들도 부지불식간에 모두 잃는다. 안타깝게도 당연한 것들이란 깨끗한 물이나 공기처럼 다시 구할 수 없는 것들일 때가 많다.

노자는 ‘세상은 신령한 그릇, 거기다가 함부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할 수 없다. 거기다가 함부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그것을 망칠 것이고, 그것을 휘어잡으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고 말 것이다(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라고 했다. 사람들은 부유함, 가치, 능력을 얻기 위해 가난함, 무가치함, 무능력함을 쉽게 버린다. 때로는 무능력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능력 있는 것만 선택할 줄 알면 무능력한 삶을 즐길 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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