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중구 대흥동에는 관사촌이 있다. 1932년 공주에서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자 도지사를 비롯한 국장급 관사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생긴 관사촌은 도청에서 산책삼아 걷기에 좋은 15분 거리에 있다. 도청에서 갈라치면 큰 도로를 따르는 길이있고 작은 골목을 이어서 가는 길이있다. 소소한 나는 골목길을 따라걸었다.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예상 못한 플라타너스가 군대 사열하듯 줄지어 서있다. 낮은 언덕으로 이어져 올라가고 있는 플라타너스는 공관으로 들어서는 길을 뭔가 특별하게 만들었다.

나쁘지 않은 중압감이었다. 모자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잎을 가진 플라타너스를 이곳에 심은 속내를 나는 안다. 아마 무릉도원을 꿈꾸며 만들었을 것이다. 어두운 동굴을 지나 터지는 빛과 함께 무릉도원이 나온다는 도화원기에서 모티브를 얻었기 때문이다.

열 채 가운데 북향에 홀로 선 집이 관사다. 몇 해 전까지 도지사가 살고 있었다. 관사는 지금도 멀쩡하다. 모더니즘이 세계적인 유행일 때 지어진 한식, 일식, 서양식의 절충가옥이다. 꼼꼼히 만들어서 지금 봐도 세련됐다. 파란 기와는 코팅한 듯 유리처럼 빛나고 빨간 벽돌 사이로 유려한 곡선과 직선이, 창이 됐다가 벽이 되기도 한다. 한참을 봤다. 아르데코 양식이라고 했다.

1920년대 프랑스에 불어닥친 고전과 현대 양식이 대전의 도지사공관으로 들어왔다. 남측 복도를 따라 다다미가 깔려있고 그 유명한 일본식 정원이 펼쳐진다. 눈높이를 엎드려 앉은 자세에서 맞췄기에 낮게 앉아야 정원의 본 모습을 볼 수 있다. 북쪽면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흑백이 조화롭다. 아주 매끈해 다다미가 깔린 남쪽과 같은 건물인가 의심이 갔다. 눈에 띄게 만들어진 둥근창과 검은 마루바닥 새하얀 벽은 오늘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만큼 세련됐다. 2층 좌식과 입식이 번갈아가며 존재하는 공동공간은 회의실이기도, 서재이기도 했단다. 청사진을 보면 얼마나 신경 쓴 건물인 지 알 수 있다는데 나는 도면 까막눈이라 잘 느낄 순 없었다.

그러나 건축을 전공한 지인은 일본의 1900년대 건축기술은 놀랍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후지산을 닮은 퇴미산 아래 도지사관사는 오랫동안 대전의 안가가 돼주었다. 이곳이 움직이면 대전이 움직이는 시절이었다.

한 동안 이곳이 8일간 경무대로 쓰였다. 임시수도였다는 말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이 내려왔다. 그는 국회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아직 시간이 있다고 기다리라 했지만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다. 1950년 6월 27일의 일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유명한 전화 한 통이 녹음됐다. “본인은 서울을 떠나지 않을것입니다. 여러분도 떠나지 마십시오.” 그 후 많은 사람이 서울에 남았고 이승만은 곧 다리를 끊었다. 서울을 떠날래야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수천 명이 납북되고 죽었다.

중요한 협약이 하나 더 있었다. 국회 승인없이 ‘재한 미국 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대전협정)’이 조인됐다. 지금의 불평등한 협정인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모태다. 이 날 넘어간 작전통제권은 오늘도 우리 손에 없다. 관사촌은 한국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 또한 우연이었을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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