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유일재 종가 설 차례상.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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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시대도 눈 깜짝할 새 바뀌며 설 역시 그 의미가 많이 달라졌다. 누군가에겐 여전히 조상께 인사를 드리고 한해의 안녕을 바라는 날인가 하면, 누군가에겐 그저 긴 연휴일 수 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기 전만 하더라도 설에 TV를 틀면 꽉 막힌 고속도로 풍경이 나왔지만 이제는 국제공항의 모습이 더 자주 방영된다. 시대의 흐름이다. 그래서 명절의 차례상 역시 과거와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정말 상다리 부러질 정도로 차례상을 차려 조상께 새해 인사를 올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정말 약소하게 차리고 휴일을 즐기는 집이 있다. 어떤 게 맞는 걸까?

◆ 다채로웠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설 차례상

설에 대한 첫 기록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와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신라인은 원일(元日·새해의 다른 말) 아침에 서로 인사했고 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또 '매년 정월에 서로 경하하며 왕이 연희를 베풀고 여러 손님과 관원들이 모인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을 고려시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설이 되면 왕은 정월에 국가 세시의례인 천지신과 조상신 제사를 지냈고 신하들은 왕에게 신년을 축하하는 예를 올렸다. 이 때 큰 잔치가 열렸고 잔치가 끝나면 관리들은 일주일의 휴가가 내려졌다.

조선에 들어선 설을 쇠는 방법이 더욱 다양해졌고 차례상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차례상은 간소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유교사상이 강했던 조선은 고려시대 때처럼 큰 잔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반도를 처음 통일한 신라와 신라의 뒤를 잇는 고려, 그리고 고려 이후인 조선이 깊은 역사를 따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신라는 왕에게, 고려는 조상에게 새해 인사를 했다는 점도 감안하면 유교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 같은 모습은 더욱 강화됐을 수 있다.

명절 차례상이 어떻게 구성됐는지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보긴 힘들지만 설에 국가 차원에서 크게 잔치를 열었고 조상에게 인사를 드릴 때 4대조까지 모셨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설의 상차림은 제법, 아니 상당히 호화로웠을 것으로 예상된다.

◆ 조선시대엔 간소하게 바뀌어

제례문화의 본래 모습을 들여다보면 지금보다 훨씬 간소한 의례와 상차림 문화를 마주하게 된다. 제례문화의 규범서인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통해 알 수 있다. 주자가례를 보면 간장종지까지 포함해서 19종의 제물만이 그려져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과일도 ‘과(果)’로만 그려져 있다. 생선 역시 오늘날처럼 조기나 방어 등 다양하지 않았고 그저 ‘어(魚)’로만 돼 있다. 대추, 밤, 배, 감을 뜻하는 조율이시(棗栗梨柿)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당연히 홍동백서(紅東白西])도 없다. 주자가례는 또 차례를 지내는 법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우선 차례는 말 그대로 차(茶)를 올리는 예로 정의하고 “정초, 동지, 초하루, 보름에는 하루 전에 청소와 재계를 한다. 이튿날 날이 새면 사당 문을 열고 신주를 모셔둔 감실의 발을 걷어 올린다. 신주마다 햇과일이 담긴 쟁반을 탁자 위에 차려둔다. 그리고 찻잔과 받침, 술잔과 받침을 둔다”고 했다. 중요한 건 주자가례는 정초를 차례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저 ‘예(禮)’라고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제철과일과 술, 차만 올린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학이 국가의 종교 수준으로 발전했고 양반의 기본강령으로까지 자리 잡으며 이 같은 간소한 차례상이 정립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주자가례가 현대 들어선 기각으로 볼 때 정말 별 것도 아닌, 효종(孝宗)의 상복을 둘러싼 예송논쟁까지 이어진 점을 보면 현재는 주자가례의 실효성에 의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어떤 걸 따라야 하나?

과거 신라와 고려는 설에 큰 잔치를 베풀었으나 조선시대엔 주자가례로 인해 간소화돼 명절마다 차례상에 대한 논란이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논쟁에 더욱 불을 붙인 건 제법 현대 들어서다. 196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문화공보부가 전남의 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펴냈는데 차례상 차리는 방법에 대해 “홍동백서 등은 상식으로 알고 있다”고 서술했다.

1969년은 군사정권의 상징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본격적인 3선을 준비하던 시기로 당시의 언론은 정부에 무척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정부가 낸 민속종합조사보고서는 대대적인 홍보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고 현재의 홍동백서나 조율이시 등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새마을운동을 통해 잘 사는 대한민국’이 강조돼야 했던 점으로 정부가 민속종합조사보고서의 차례상을 올바른 것으로 강조했을 여지까지 맞물렸을 수 있다. 이 때문에 화려한 차례상이 전통인 것처럼 포장된 셈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 홍동백서나 어동육서 같은 단어를 교과서에 봤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1인 가구의 증가 등으로 전통(?)의 화려한 차례상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차례상에 대한 고찰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퇴계문집고증(退溪文集攷證)’을 통해 “차례는 음식의 종류는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에 예전과 똑같이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는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역시 ‘격몽요결(击蒙要诀)에서 “제사는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을 위주로 할 뿐이다. 가산의 규모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즉, 집안 형편에 따라 하라는 것이다.

결국 시대가 흐르면 모든 건 자연스럽게 바뀐다. 우리가 쓰는 한글 역시 세종대왕 이후 수많은 변화를 거쳤다. 설 등 명절문화 역시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조상의 터인 무덤을 벌초하는 것마저 자본주의로 물든 마당에 차례상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어졌을 수 있다.

사라져가는 종가 제례문화의 원형을 문화유산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 한국국학진흥원의 김미영 수석연구위원은 “전통시대 선조의 덕을 기리고 친족 간의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됐던 제사 문화가 오늘날 그 반대의 효과를 낳는 것은 전통을 잘못 이해해서다. 조상의 뜻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퇴계와 율곡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고 전문가가 제안하는 것처럼 차례를 지낼 때 마음만 있으면 된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례상을 차리는 게 계속된다면 결국 차례는 결국 사문화(死文化)가 될 수밖에 없다. 그저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으로 지내면 된다. 그리고 신라인들처럼 서로 경하하고, 고려인들처럼 휴가를 갔다 오면 된다.

차례상은 무조건 홍동백서 등을 따라야 한다는 이들에겐 우리네 세시풍속이 사라지고 있는 게 슬프겠지만 더 중요한 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앞으로도 설 연휴는 짧으면 3일, 대체휴일이 포함된다면 5일이 유지돼서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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