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칼럼] 기해년(己亥年) 설날 풍경
[금강칼럼] 기해년(己亥年) 설날 풍경
  • 금강일보 기자
  • 승인 2019.02.0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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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위원장

주말 이틀을 앞세운 2019년 기해년(己亥年) 설 연휴는 여느 때보다 길었다. 연휴가 짧으면 짧은 대로 바쁘고 길면 긴 대로 힘든 것이 명절이다. 우리 집의 명절 일정은 부모님 계시는 김천에 가서 하루를 지낸 다음 장모님이 살고 계신 강릉으로 갔다가 보통 3일째 대전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번에 고려해야 할 일은 큰 딸이 연휴를 맞아 동남아 여행을 간다는 것과 둘째 딸 생일이 연휴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다.
식구들이 일정을 미리 정했다. 설날 앞쪽으로 휴일이 이어지므로 강릉 장모님 댁에 먼저 가기로 했다. 토요일에도 직장에 나가는 큰 딸과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는 둘째 딸은 함께 갈 수 없었다. 춘천 처제 가족들, 서울 처남 식구들도 설날에 오기 때문에 만날 수 없었다. 혼자 계시는 장모님과 근처 사는 처형, 동서와 함께 단출하게 1박 2일을 보냈다. 장모님 손맛 그득한 상차림에 강릉 가까운 바다에서 잡은 오징어 회, 달인이 만든 찹쌀떡을 곁들여 참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강릉에서 대전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두 딸이 서울에서 나란히 왔다. 다음 날, 둘째 딸 생일을 축하한다며 모처럼 외식하러 갔다. 음식 맛 평가도 하고 연휴에 만날 친척들 얘기도 했다. 일 년 전에 미처 정하지 못해 미뤘다가 지난 1월 뒤늦게 챙겨준 둘째 생일 선물 얘기며, 큰 딸의 동남아 여행 계획 얘기며, 가벼운 수다와 웃음으로 음식 맛을 돋우었다.
그리고 큰 딸은 공항으로 떠났다. 남은 세 식구는 김천으로 갔다. 가자마자 아내와 나는 모듬전을 부치고 돼지고기를 삶고 갖가지 차례 음식을 준비했다. 일하느라 일찍 오지 못한 동생 부부는 저녁 상차림에 맞춰서 달려와 음식과 술을 나누었다. 여름 휴가 때 우리 대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을 일일이 인화해 멋진 앨범으로 만들어온 제수씨에게 감탄하면서 한편에서 재롱을 떨고 있는 어린 조카와 연신 눈맞춤을 했다.
설날 아침은 부산하고 분주하다. 준비한 차례 음식들에 더해서 과일 깎아 모양을 내고, 밤 까고 통호두 깨트려 맵시있게 차례상을 차린다. 지방 쓰는 것과 제삿날 축문 쓰는 것을 전담하셨던 아버지는 시력이 약해졌다며 나에게 지방을 쓰라 하신다. 현 본관경주 이공 조상어른 신위라고 꾸불꾸불 한자로 썼다. 안경을 벗고 지방을 살펴 보시면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나 죽으면 지방 쓸 때 학생부군 신위가 아니라 관직을 넣어서 이OO 교장 신위라고 해야 한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 또래 친구들은 거의 돌아가셨다.
그렇게 평화롭게 우리 집 설날은 흘러가는데,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광화문에서 새 소식이 전해온다. 지난 12월 태안화력에서 숨진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가 설 전에는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단식에 들어간 지 15일째 되는 날이다.
설 전날부터 꼬박 24시간 이상 진행한 시민대책위와 정부, 여당의 마라톤 교섭과 발전회사와의 세부 교섭까지 모두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아, 그나마 다행이다.’ 나도 몰래 탄성을 나지막히 뱉었다. 오후가 되자 정부 관계자들이 합의 내용에 대해 공식 발표했다.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발전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속히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내용들이 담겼다. 바로 산업부 장관, 노동부 장관, 기재부 차관 등이 광화문 분향소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
외동 아들을 무참하게 잃고 설날조차 집에 가지 못하던 고 김용균 씨의 부모님은 이제야 집에 가겠구나. 명절 때마다 볼 수 없는 아이 생각이 더욱 사무치리라. 명절에도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과 어떤 이의 목숨이 걸린 투쟁은 이렇게 교차하는데 세상은 꾸역꾸역 돌아가고 있구나. 지금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홀로 아프고 또 다른 곳에서는 누군가 고독사에 이르고 있겠지. 그런 사람들도 함께 품고 가는 세상이면 참 좋으련만. 2019년 기해년 설 연휴가 이렇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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