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자 박사의 5분 중세사] 메디치家 이야기 3
[양태자 박사의 5분 중세사] 메디치家 이야기 3
  • 금강일보 기자
  • 승인 2019.02.0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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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자 박사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와 유대인들의 결혼을 금했는가 하면, 당시에 그리스도 신자들만이 갈 수 있는 창녀촌에 유대인들이 들락거릴 경우 큰 벌금을 물게 했고, 한 그리스도교 창녀가 유대인을 상대로 성을 팔았다가 이 여성은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에서 허리와 엉덩이 사이의 요부를 드러낸 채 채찍질을 당했다는 얘기도 남아있다. 거기다 1683년 코시모 3세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여인들이 유대인 집 아이들 유모로 일하는 것조차 금지 시켰다.
사실 당시는 이 코시모 대공만이 이렇게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억압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민초들의 손에, 왕권들의 손에 그리고 가톨릭 수장들의 손에 의해서 수모를 당하면서 죽음으로 내 몰려야했던 얘기들은 수두룩하다.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수백년간의 이런 흑역사도 모자라, 20세기에 들어와 독일 나치들이 다시 한 번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유대인들과 유럽인들의 갈등은 이렇게 천 년이 넘게 역사적으로 뒤 엉겨져있다.
다시 코시모 3세의 얘기로 돌아와, 코시모는 마르그레트 루이즈 도를레앙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루드빅히 13세의 조카이자, 루드빅히 14세의 사촌이었다. 코시모의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코시모 3세의 결혼생활 역시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일단 코시모는 깊은 우울증 기질인 데다가 특히 여자, 심지어 부인과도 신체 접촉을 그리 꺼렸다 보니 어쩌면 코시모 대공은 동성애자 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부인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데, 그것도 늘 한 의사를 감시자로 두고선 부인과 잠자리에 들어갔다는데, 이 의사가 맡은 역할은 이 대공을 가급적이면 침대로부터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계속해서 부인과 침대에 있다 보면 어쩌면 그의 건강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란다. 우울증을 가진 그의 성격과는 달리, 그의 부인 마르그레트는 아름다운 데다가 덤으로 아주 생기 넘치는 이기적인 여인이었다는데 여행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런 삶을 즐겼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는 애인도 따로 있었는데, 바로 칼 폰 로트링(Karl von Lothring) 왕자다. 아무튼 그녀는 대공 부인 역할을 싫어했고, 거기다 플로렌즈라는 도시 자체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이런 어긋난 관계 속에서도 코시모 대공의 속내는 타고 들어갔는데, 메디치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염려해서 늘 후손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다행히 그는 1663년 아들 페르디난도(Ferdinando)를 얻는다. 그리 행복한 결혼도 아닌 가운데 그녀가 두 번 째 임신을 하게 되자 낙태 시도에 실패해 결국 아이를 낳았는데 바로 딸 안나 마리아였다. 부부간 갈등의 고리들이 여전히 깊게 얽힌 가운데서도 다시 세 번 째 아이를 낳는데 바로 기안 가스토네(Gian Gastone)다. 정리해보면 코시모 대공은 첫째 아들 페르디난도(Ferdinando), 둘째는 딸 안나 마리아, 셋째 아들 기안 가스토네가 된다. 코시모 대공 스스로가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 결혼을 했던 지라, 자식들에게는 가급적 이런 결혼의 대물림 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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