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런타인데이에 묻힌 안중근 의사 사형 선고
변호 위한 모금운동 전개 등 당시 상황 조명
3·1운동 100주년… 올해만큼 안중근 기억되길

#.1 1908년 10월 26일.

가슴에 품어둔 조국의 기를 모두가 볼 수 있게 펼친다.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경찰 무리가 무장을 한 채 둘러싼다. 두렵냐고? 천만에…. 나의 임무를 다 함에 온몸엔 긍정의 소름이 올라오고 설렘이 가득하다. 다만 어머님, 죄송합니다.

#2. 1909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됐다는 이야기는 한반도 전역에 퍼졌다. 모두가 분개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올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대한민국은 조용히 세계 최초의 평화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준비한 거사는 10년 뒤에 이뤄진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10년 전인 1909년 이상한 재판이 열렸다. 재판이 열린 곳은 중국이지만 참관인은 일본인이 더 많았다. 피고인석은 물론 원고인석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참고인석에만 일본인이 앉아 있었다. 원고인은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자체였다. 그리고 피고인은 재판장이 아닌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바로 안중근 의사다. 여느 재판이라면 피고인의 변호도 들어야 했지만 재판부는 공식적인 절차를 무시한 채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한반도는 대한의국 참모총장이었던 안중근에게 사형이 내려졌단 소식에 비통해했다. 항소를 위한 모금운동도 전개됐다. 당시 열강에서도 그의 애국심에 감동받은 적지 않은 푸른 눈의 변호사가 무료로 변호를 맡겠다고 자청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항소하는 것도, 변호하는 것도 일본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과 같다”며 모금은 물론 어떠한 변호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오로지 조국을 위한 의연함에 전국은 마음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다만 그는 고등법원장과 면담을 통해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했을 뿐이다. 한 달여가 흐른 뒤 안중근 의사는 형장의 이슬이 돼 귀천한다. 그리고 10년 뒤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선 사형 선고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민초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게 3·1운동은 시작됐다.

올해 독립의 시발점이 됐던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동시에 3·1운동을 촉발시킨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와 집행도 110주년을 맞았다. 특히 사형 선고일은 2월 14일이다. 2월 14일은 남녀노소에게 친근한 날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형 선고 때문이 아니다.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 때문이다. 밸런타인데이가 정확히 며칠인진 몰라도 ‘초콜릿 주는 날’이라고 하면 대개 알아듣는다. 그래서 이맘때 쯤이면 유통업계는 물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은 조만간 찾아오려는 봄을 예고하는 듯 매우 산뜻하고 활기차다. 누군가는 초콜릿을 받음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고 누군가는 초콜릿을 줌으로써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어느 때보다 더욱 활기찬 밸런타인데이이지만 올해만큼이라도 그를 기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올해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상징인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은 해이고 밸런타인데이에 들뜰 2월 14일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선고받은 110주년이나 되는 뜻깊은 날이어서다. 매일이 아니라 올해 2월 14일 단 하루만이라도 말이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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