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숙 대전공고 교사

집안 빚을 떠안고 말 못하는 할머니와 남겨진 ‘지안’은 할머니를 때리는 사채업자의 등에 칼을 꽂는다. 비정규직 ‘지안’은 부장 ‘박동훈’에게 잘못 배달된 뇌물을 훔치면서 그와 엮이기 시작한다. 박 부장을 쫓아내려는 회사 대표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지안’은 박 부장의 핸드폰에 도청 앱을 설치하고 그의 일상을 엿듣지만 결국 박 부장을 지켜낸다. 왜냐하면 ‘박동훈’은 ‘지안’을 지켜주는 ‘나의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때 놓치고 뒤늦게 본 드라마 이야기.

삶이 슬픈 한 인간이 삶이 아픈 한 인간을 본다.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 주잖아.” “누가 날 알아. 나도 걔를 알 것 같고… 슬퍼. 날 아는 게 슬퍼.” “너,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내가 불쌍하니까 너처럼 불쌍한 나 끌어안고 우는 거야.” ‘아저씨’는 말한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쿄의 미소’(문학동네, 2016)에는 일곱 가지 사정이 조심스럽게 가라앉아 있다. 자신이 네 번이나 죽을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아서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가 윤성희의 ‘첫 문장’(현대문학, 2018)에 등장한다. 정이현의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현대문학, 2018)에서는 ‘누가 아프다고 하면 심장 안쪽에 손을 넣어 눈물을 닦아 줄 필요까지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어른의 은폐와 유예가 아이들을 슬프게 한다. 그래도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창비, 2018)에는 슬픔의 뿌리가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연대가 기쁘게 힘겹다.

어떻게 인간의 슬픈 사정들을 이리도 잘 아는 걸까. 도대체 그 슬픔이 우리의 것이게 하는 이야기의 힘은 뭘까. 슬픈 사람은 소중하다. 슬픈 사람 없이 소설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슬픈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이자 슬픔을 알고 알게 하는 것으로 빚을 갚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기 초 반 아이와 상담을 하며 아이의 슬픔에 내 슬픔을 조심스럽게 포개 보았다. 아이는 별 말이 없었지만 아주 천천히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2학기에는 자기 것 사며 같이 샀다고 커피도 여러 번 건네주었다. 마침 기회가 있어 장학금 수혜자로 추천을 했다. 아이의 새 학년을 응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름처럼 편하게 살아.” ‘박동훈’이 ‘지안(至安)’에게 한 말을 해주고 싶었다. ‘아저씨’처럼 좋은 어른이 된 기분, 이건 드라마의 아름다운 후유증인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한겨레출판, 2018)을 읽으며 기대한다.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슬픔을 제대로 슬퍼할 수 있겠다. 슬픔이 슬픔을 돌보며 모두 ‘아저씨’가 돼줄 수 있겠다. ‘지안’의 ‘할머니’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겠다. “모든 인연이 다 신기하고 귀해. 갚아야 돼. 행복하게 살아. 그게 갚는 거야.” 나에게는 ‘나의 책冊씨’라는 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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