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한편 장빈은 강유와 말을 맞추고 부흥의 때를 기다리며 도성에서 숨어 지냈다. 그의 주변에는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 여럿 있었다. 오늘도 몇 사람이 장빈의 처소로 찾아와 망국한을 달래고 있었는데 강발이 급히 찾아와 말하기를

“장형! 이제 모두 다 끝났소. 아버님께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하시며 여러분과 함께 몸을 피했다가 후일을 도모하라 하시었소.”

“허허, 도성에 불이 나기를 눈 빠지게 기다렸는데 대장군께서 그리 분부하셨단 말이오. 절통 하오이다. 천수인 것을 어찌 거역한단 말이오.”

장빈이 탄식하고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해 하자 조개가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외치기를

“대장군의 말씀을 따릅시다. 강발이 말한 대로 후일을 기약합시다. 장부가 한번 뜻을 세웠는데 손을 놓고 죽기를 기다릴 수 없소. 어서 몸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요.”

“옳아요. 조개의 말이 옳습니다. 여기 오래 머무르면 죽는 일 밖에 없소. 지혜를 써서 잠시 피했다가 후일을 기약합시다.”

장빈이 비장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하자 조개가 다시 말하기를

“일이 이리 급한 마당에 처자권속을 모두 다 건사할 수는 없소이다. 저는 나이 어린 석늑만을 데리고 오겠소. 조부님이 석늑이 장래가 촉망된 아이라고 특별히 귀여워했으니 그만은 버릴 수가 없소. 누가 석늑을 보호해서 성문을 빠져 나갈 수 없겠소.”

“장군님! 제가 어린 석늑을 보호해서 성을 빠져나가겠습니다. 나는 선대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으니 어린 주인을 보호해서 성을 빠져나겠소. 맡겨 주시오.”

조개의 말을 받아 급상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급상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 조개의 말대로 집으로 달려가서 석늑을 업고 나타났다. 급상은 참으로 빠르고 날랜 행동을 보였다. 이리 재빠른 급상의 행동을 보고 모인 사람들이 한마디씩 말하기를

“참으로 민덕의 용맹이 특출하고 은혜를 알고 의리가 두터우니 석늑은 근심하지 아니해도 될 것이오.”

민덕은 급상의 자이다. 이때 위연의 아들 3형제 중 첫째 위유가 나서서 말하기를

“우리 3형제는 여러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우리 셋이 앞장서서 혈로를 열 것이오. 여러분은 바로 뒤를 따르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빈은 형과 아우의 도움을 받아 여러 동료들을 이끌고 성을 벗어나려고 발을 떼었다. 그리고 앞장 선 위유 3형제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남문에 이르자 수문장 이명이 수백 군을 이끌고 앞을 막았다. 쉽게 성문을 내어주지 않을 태세다. 먼저 장빈 일행이 칼을 빼어 들고 나아가자 등애의 군사들이 대적했다. 양편이 서로 부딪쳐 싸우자 가장 불편한 사람은 급상이었다. 급상은 석늑을 등에 업고 싸우자니 행동이 몹시 부자연스러웠다. 이를 눈치 챈 등애의 장수 이명이 말을 급히 급상에게로 몰아갔다. 급상을 만만하게 여기고 다가오자 급상은 이명을 향하여 벽력같이 크게 고함지르기를

“이놈~! 나를 업신여겼단 말이냐?”

급상은 도끼를 휘둘러 이명이 탄 말허리를 찍었다. 말이 허리가 부러지자 이명이 낙마하여 헐래 벌떡거리자 번개같이 급상이 도끼로 이명의 목을 잘라버렸다. 이명이 찍소리도 못하고 죽자 이를 본 등애의 병사들이 놀라 달아났다. 장빈은 조개 위유 급상을 지휘하여 등애의 병사들을 물리치고 성문을 빠져 나왔다.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성문을 빠져 나온 것이다.

장빈 일행이 성 밖을 나오자 하늘이 돕는 것인지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유비의 자손들과 왕미 일행이 그들이다. 장빈은 이 모든 사람들을 한 무리로 만들어 기약 없는 여정을 시작했다. 이들은 이제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이 뜬구름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방랑길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유봉의 아들 유영은 유연을 호위하여 집을 떠나려다가 문득 의형제를 맺은 왕미 생각이 났다. 그래서 유영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무리 앞뒤 분간이 어려운 지경이라도 왕미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의로 맺어진 의형제가 아닌가.’

유영은 그리 마음먹고 유연의 허락을 받고 황급히 왕미의 집으로 달려갔다. 왕미는 다름 아닌 북지장군 왕평의 아들로 용맹이 절륜하여 촉나라에서는 그와 필적할 자가 없었다. 힘이 장사여서 1천근을 들 수 있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면 그야말로 백발백중이었다.

그런 왕미가 아버지 왕평의 뒤를 이어 나라에서 준 벼슬을 받았으나 내시 황호 때문에 그만 두었다. 그런 벼슬아치들은 비단 왕미 뿐만 아니었다. 후주가 황호를 총애하고 충신의 간언을 배척하여 정사를 그르치자 벼슬을 버리고 산간으로 들어간 이들이 많았다. 한때는 대장군 강유마저도 황호의 농간에 놀아나 구국군무를 그르치기도 하였으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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