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철 씨 한남대 졸업…나이도 막지 못한 ‘학사모의 꿈’
손주뻘 동기들과 함께한 대학생활
오래오래 잊지못할 추억으로 남아
랩동아리서 활동하며 거리 버스킹
“남은 인생도 계속 도전하며 살 것”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났지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살 곳도, 갈 곳도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했다. 충북 청원 산 속에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렸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모든 게 폐허가 된 뒤였다. 겨우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움을 뇌리에서 잊고 살았는데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다 돼서 자신도 모르게 대학 졸업장이 손에 들려있었단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만학도 임원철(75) 씨 얘기다. 

1954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큰 형님이 군 입대를 하는 탓에 덜컥 한 집안의 가장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연탄도, 가스보일러도 없는 까닭에 나무라도 하려는 참이면 눈앞을 지나가는 교복 입은 또래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고 했다. 임 씨는 “나무하러 갈 때 교복입은 애들 보면 창피해서 숨어있다 나오곤 했다”며 “살 길이 그냥 막막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내겐 사치였지만 서러우면서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더라”고 먹먹해했다.

이후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책임진 그는 닥치는 대로 일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살다 여유를 곱씹어볼 때 쯤 문득 잊고 있던 배움의 한(恨)이 강렬하게 떠오르더란다. 예지중·고를 입학한 게 그 무렵이다. 임 씨는 “정신없이 살다보니 졸업장이라곤 달랑 초등학교가 전부인 게 서글펐다”며 “‘이제 하고 싶은 걸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사업도 접고 만학(晩學)의 길로 방향을 틀어 오늘에서야 졸업을 하게 됐다”고 웃어보였다.

한남대에서 보낸 4년의 대학 생활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 할 추억을 선물했다. 찰나의 순간 불쑥 튀어나온 랩 한 소절은 그를 학교에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려놨다.

어디 그뿐이랴. 동기들과 밥을 먹고 난생 처음 발을 들여 본 코인 노래방, 강의가 없을 때면 달려갔던 동기들의 자취방에서 쌓은 우정의 여행은 대학 생활 내내 ‘삼촌’으로 불렸던 임 씨에게 기쁨이요, 행복 그 자체였다.

그는 “전문으로 공부한 게 아니어서 실력은 별 볼일 없어도 랩은 학교에 다니면서 학과 동기들과 나를 이어준 고마운 존재”라며 “대학 내 랩 동아리에 가입한 뒤엔 대전 으능정이거리, 천안에서 래퍼들과 어울려 버스킹도 했는데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 보겠느냐”고 반문했다.

랩으로 시작한 대학생의 여정은 지난 주 졸업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임 씨는 이제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어제는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달렸다면 내일은 그만의 여유를 찾아 나설 심산이다. 임 씨는 “조만간 전국 배낭여행을 다녀오면 아들이 준 색소폰도 배우고 운동도 하면서 나를 더욱 가꾸고 싶다”며 “하지만 내게 이 정도로 즐거움과 재미를 던져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좋은 세월이었던 4년의 대학생 시절은 가슴 속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글·사진·영상=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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