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윤 배재대 간호학과 교수

 
안성윤 배재대 간호학과 교수

 커다란 사자가 당신을 물어서 흉터가 생겼다면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무용담을 이야기할 것이다. 물론 사자에 대한 트라우마는 생길 수 있다. 반면 작은 생쥐가 당신을 물어 흉터가 생겼을 때의 반응은 좀 다를 것이다. 보이는 족족 잡아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생쥐라면 끔찍하게 혐오하게 될 지 모른다.

흉터가 생기도록 물렸다는 동일한 사건을 겪었음에도 무엇이 이런 반응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거기에는 일정한 전제가 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사자와 생쥐라는 존재의 가치를 평가했고 이를 통해 당신에게 자행한 행위에 서로 다른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즉, 사자는 당신을 물 수도 있는 존재이므로 물리지 말아야 하는 책임은 나에게 있다. 그러나 생쥐는 나를 무서워하며 피하고 숨어야 하는데 감히 나를 물었으므로 모든 잘못과 책임은 생쥐에게로 돌려진다.

우리의 공정해 보이는 판단은 이렇듯 항상 일정한 전제가 있다. 어떤 분쟁이 일어나서 잘잘못을 판단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직위나 나이를 서로 바꿔서 사건을 설명할 경우 잘못의 주체가 상반된 것으로 느껴지는 일이 종종 있다.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더 많은 도덕성과 면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쥐 집단이 성장할 경우 왠지 모를 못마땅한 느낌이 수반된다. 그렇지만 ‘생쥐 따위가 어찌 감히’라고 대놓고 표현하는 일은 비난의 위험 때문에 피한다. 대신 생쥐의 다른 사소한 단점을 지적함으로써 논점을 흐린다. ‘사자는 당당히 모습을 보이면서 나타났는데 생쥐는 모습이 보이지 않게 나타나서 해를 끼친 것이므로, 생쥐가 사자보다 더 큰 문제’라는 식으로 존재나 상황의 변하기 어려운 특징과 관련된 부분을 빌미삼아 자신의 혐오를 합리화한다.

그런 것이 혐오이고, 그 대상은 대개 그런 방식으로 소수자를 향한다. 소수자 집단에 일련의 동정을 보냈던 착한 사람들조차 소수자 집단의 급격한 성장은 꺼려한다. 두려워할만한 사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가치를 훼손하지 않지만, 두려워하면 자존심 상하는 생쥐 따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 가치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낸 카드가 ‘혐오’다. 지난날처럼 무시하거나 동정하기에는 지나치게 커져버린 대상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빨리 도덕적 판단 주체라는 지위를 독점해 소수자를 평가하고 논리적 반박이 어려운 혐오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차별이다. 내 안에 차별적 시선이 있기 때문에 사자는 단죄하지 못하고 생쥐는 단죄하는 것이다. 즉, 상위자가 화내면 내가 혼나는 것이지만 하위자가 화내면 나에게 기어오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 식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선량한 줄 알았던 당신도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소수자를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사용해서 지루해지거나 누군가와 트러블이 생겨 한동안 그 사람이 밉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꺼려질 만큼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의 대상이 생겼다면 그 이유가 오로지 상대의 책임인지, 내 안의 어떤 것이 미움을 극대화하는 확대경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안의 차별적 시선을 거두고 보면 생쥐 집단의 성장도 사자 집단의 성장과 똑같은 정도의 부러움과 경쟁의 대상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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