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오백리길은 떠들썩한 삶에 치인 이들에게 잠시 고요함을 선물해 준다. 봄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자신이 질 걸 알면서도 겨울은 마치 시샘하듯 맹렬한 계절 다툼을 벌인다. 그 날, 가냘픈 목소리로 서글피 우는 까마귀 소리로 가득 찬 3구간으로 향하는 길이 그랬다.

2구간의 마지막인 냉천 버스종점을 지나 홀로 쭉 뻗어나간 길에서 3구간의 첫 발을 내딛는다. 터벅터벅 걷고 있다 보면 고려 말 이웃과 함께 사는 미덕을 발휘했던 회덕황씨(懷德黃氏)네 발자취, 미륵원(彌勒院)을 만나게 된다. 사설 여관으로 여행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던 이곳은 훗날 구호활동부터 사회봉사까지 그 영역을 확대했다. 사실상 대전 땅에 처음 들어선 민간사회복지기관인 셈이다. 나눔과 배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시대 최대의 화두인 복지를 그 때 그 사람들도 절실히 느꼈던 모양이다.

관동묘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대청호
잔잔한 풍경은 일상의 힘듦을 잠시 잊게 해준다

 

어디 미륵원뿐이랴. 미륵원을 지나 꼬불꼬불 한 샛길을 따라가면 이번엔 은진송씨(恩津宋氏)의 효심(孝心)과 마주하게 된다. 웅장하면서 잔잔함을 가득 지닌 대청호의 경관에 집중하다간 관동묘려(寬洞墓廬)를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어머니 유씨 부인이 죽자 장례를 지낸 후 만든 이 재실은 홑처마 팔작지붕의 위용도 그렇지만 조선 특유의 향기가 나지 않는 게 특징이다.

관동묘려에 깃든 효성(孝誠), 그 감정 그대로를 가슴에 아로새긴 채 이번엔 대청호의 광활한 풍경에 몸을 던져본다. 마산동전망대를 향해 난 흙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새끼오리 여럿이 놀란 듯 물 위를 냅다 휘달린다. 황톳빛 가득 안은 채 대청호반을 따라 쭉 뻗은 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일상에 지쳤던 스스로를 향해 던지던 생각을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휴식이 아니라,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휴식이라고. 몸이 쉬는 게 휴식이 아니라 뇌리를 온통 가득 채운 생각을 멈추는 게 휴식’이라고. 그러다보면 어느 샌가 탁 트인 대청호 호반이 눈에 들어오는 마산동 전망대에 오른다. 그리고 홀로 선 전망대 위에서 진정한 휴식을 맘껏 누려본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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