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도씨 종중문서 일괄(보물 제724호).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한말 의병과 독립운동사에서 충청출신 지사는 빼놓을 수 없다. 을사조약에 항거를 주도하다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쓸쓸히 숨진 최익현, 일본의 국권강탈 이후 만주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장을 지낸 이동녕, 헤이그특사 활동과 대한광복군정부 설립을 주도한 이상설,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김좌진,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을 투척하고 총살당한 윤봉길, 3·1운동 여성독립운동가의 상징으로 자리잡은 유관순 등이 바로 그들이다.

왜 충청권에서는 우리 한국 근대사 속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충청유학자의 충절전통에서 비롯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이 시점에 충청유학자들의 충절의 계보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즉 ‘충성스러운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태조 이성계의 왕지를 받고도 출사하지 않은 청송당 도응(桃應)이 있다. 태조의 친필로 내려진 문서는 오늘날 성주도씨 집안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국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던 사육신 중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3명이 충청출신이다. 중봉 조헌은 왜적을 맞아 금산전투에서 칠백의사와 최후를 맞이하였고, 팔송 윤황은 병자호란시 척화의리에 앞장섰다.

충절의 바탕이 되는 ‘의리’를 사상적으로 강조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다. 그는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과 실천의리를 중요시하였다. 그의 사상은 권상하, 한원진으로 이어져 한말 의병과 독립운동가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외세에 맞서 싸우는 자주적 의리를, 대내적으로는 부정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의리를 앞세웠다. 이러한 사상적 토양 아래 충청이 충절의 계보를 이어왔음을 기억하자.

이상균(충남역사문화연구원 백제·충청유교특성화추진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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