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 전의면 김오 선생 묘에서 출토된 백자 명기와 채색치마인물상 목용木俑 (1580년) [충청남도역사박물관 소장]

박물관에서 어렵잖게 볼 수 있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명기(明器)’이다. 명기는 자기로 작게 만든 그릇이나 항아리 형태가 일반적인데, 자기나 나무로 만든 작은 인형인 용(俑)을 함께 넣기도 한다. 이러한 부장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도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무덤에 넣는 것이다. 이처럼 내세의 평안을 기원하는 행위는 곧 생전에 못다한 효를 돌아가신 후에라도 다하려는 지극한 효의 발현이다.

논어에 ‘신종추원(愼終追遠)’이란 말이 있다. 부모의 장례를 극진하게 모시고, 나아가 대가 먼 조상에게도 추모의 예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효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후에도, 즉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다. 풍속의 변화로 예가 간소화되는 추세지만, 그래도 장례에 비용을 아끼지 않고, 명절에는 먼 조상들께도 정성껏 제사를 올리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대인, 필자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살아간다. 즉 부모에 대해서 일종의 부채의식, 죄책감 같은 것이 있다. 더 나은 자식이 되지 못해서, 사소하게는 용돈을 많이 못 드리거나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등으로. 불효를 대가로 얻은 어떤 성취도 그 죄책감을 씻어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불효를 원죄처럼 안고 사는 현대인의 숙명이 아닐까 싶다.

유교에서는 ‘효’가 인간의 근본이다. 따라서 내면화된 유교적 가치관인 ‘효’의 발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효에 관한 현대인의 정서적 불안은 그 발현이 현실 장애로 인한 부자연스러움 때문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같지 않을까? 다할 수 없어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운 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무거운 마음이 있는 우리는 모두 보다 큰 효를 실천할 준비가 된 ‘효자’들이다.

 

장을연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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