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물설고 낯선 땅 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척박하고 황폐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에겐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었다. 빼앗긴 조국 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의지가 강해질수록 탄압과 감시도 심해졌다. 최고의 군사무기는 없었지만 독립에 대한 들끓는 열망이 있기에 죽어도 죽을 수 없고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각오로 싸웠다. 그 험난한 길엔 대전의 독립영웅들도 함께했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독립된 나라, 민주공화국으로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들이 꿈꿨던 나라로 가기 위한 길고 길었던 여로를 4편에 걸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재구성해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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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년, 대전 독립영웅의 꿈 ②-Ⅰ 김용원

김용원

"잃었던 조국 회복하는 날, 기꺼이 죽으리"

대동단서 의친왕 망명 시도한 김용원
1921~22년 임시의정원 의원 역임
임정 혼란기, 무장독립운동 모색도 

18살 무렵 나라가 망했다. 양반의 후예라곤 하나 소농에 불과했던 우리집,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현 대전 서구 원정동)에도 오래지 않아 그 소식이 들렸다. 일곱 살부터 한학(漢學)을 배웠지만 더는 무용지물이었다. 틀에 박힌 학문을 고수한 결과가 결국 망국 아니었던가.

망국의 치욕을 떨치기 위해선 신학문을 수학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갖고 1912년 고향을 떠났다. 상경한 나는 중동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공부하며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했다. 운명이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점조직으로 만들어진 대동단엔 귀족은 물론 종교인, 상공인, 부녀자, 학생 등 광범위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들이 주로 관심을 갖던 인물이 있었다. 고종의 다섯 째 아들, 의친왕 이강(李堈)이다. 우린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 독립의 중심 역할을 해 줄 것으로 확신했다.

1919년 11월 10일, 의친왕을 모시고 기차에 올랐다. 조선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의친왕이 사라진 사실을 알면 간사한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평양을 거쳐 신의주, 압록강철교를 빠져나갈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상해로 의친왕을 탈출시키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만주 안동(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 다다를 무렵 일제에 발각됐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나와 단원들은 체포를 면했지만 의친왕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1928년 11월 21일 일제에 의해 촬영된 김용원 애국지사의 모습. 해당 사진은 일제가 제작한 감시대상인물카드에 실려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의친왕 없이 상해에 들어간 나는 망명을 결심하고 임정에 몸을 의탁,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임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각 지도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멈추지 않은 탓이다. 나 역시 그랬다. 의정원 의원까지 한 내가 무력을 통한 독립을 고민하고 있었다. 번뇌를 거듭한 끝에 결심을 굳힌 나는 중국 무관학교로 발을 돌렸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모여 이내 독립의 길을 열어 젖힐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육신에 찾아온 병이 발목을 잡았다. 더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다시 기로에 선 나는 뒤에서 그들을 돕기로 했다. 1924년 무관학교를 나와 국내에 들어온 뒤 그 해 7월부터 9월 일제에 체포돼 수감될 때까지 여러 곳을 다니면서 오근영과 함께 액면가 500원의 조선독립공채를 교부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옥중생활을 마감한 후에도 독립 행진에 속도를 높이던 나는 1934년 2월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돼 투옥과 석방되길 반복했다. 그해 7월, 옥고의 여독이 숨통을 조일 때도 오직 독립뿐이었다. 독립의 자유종이 울릴 때 동아(東亞)에 다시 서서 세계만방 으뜸이 돼 있을 조국을 꿈꾸며 그렇게 나는 기쁜 맘으로 죽음 앞에 섰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시대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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