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물설고 낯선 땅 위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척박하고 황폐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에겐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이 있었다. 빼앗긴 조국 해방을 위해 끊임없이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의지가 강해질수록 탄압과 감시도 심해졌다. 최고의 군사무기는 없었지만 독립에 대한 들끓는 열망이 있기에 죽어도 죽을 수 없고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각오로 싸웠다. 그 험난한 길엔 대전의 독립영웅들도 함께했다. 결코 쉽지 않았지만 독립된 나라, 민주공화국으로의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들이 꿈꿨던 나라로 가기 위한 길고 길었던 여로를 4편에 걸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재구성해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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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 100년, 대전 독립영웅의 꿈 ④ 송석형·이정헌

송석형 애국지사(맨 아래줄 왼쪽 첫 번째)와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의 모습. 송석형 애국지사 유족 제공

날지 못한 독수리, 그리고 뒤틀린 역사

일본에 광복군으로 맞선 임정
송석형, OSS 훈련하며 국내침투계획 참여
이정헌, 징집 후 일본군 탈출해 광복군 가담

침체된 분위기 속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봉창이 적의 심장부에서, 윤봉길이 상해에서 의거하며 임정을 흔들었던 외교와 독립전쟁의 분할이 멈추게 되면서다. 물론 이후 임정은 상해 시대를 마감하고 항저우, 전장, 창사, 광둥,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먼 길을 떠나야했지만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이 가장 큰 배경인 것을 생각하면 기쁘게 감내할 수난이었다.

6000리 넘는 대장정을 마친 임정은 충칭 시대를 열고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을 창설,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다. 고향 대전군 대전읍(현 대전 중구 대흥동)을 떠나 중국군 유격대로 활동하며 공작을 수행하던 내게도 소식이 들렸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내가 가야할 길이었다. 1년 3개월간의 유격대 생활을 마친 나는 곧 광복군에 참여했다.

한·미특수훈련반(OSS) 가입 당시 제출한 송석형 애국지사의 사진. 송석형 애국지사 유족 제공

광복군에는 나처럼 중국유격대에서 활동하거나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탈출한 경우가 많았다. 고향이 같은 이정헌이 그랬다. 그는 일본 동경 전수대학에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됐다. 내 나라를 강탈해간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게 얼마나 분하고 치가 떨렸을까. 결국 그 해 12월 일본군을 탈출, 중국 망명길에 올라 이후 광복군 제3지대에 합류했다고 했다.

광복군 제2지대 부대원 증명서. 송석형 애국지사 유족 제공

우리는 광복군에 입대해서 후방 침투 인력과 물력을 쟁취한 뒤 파괴하는 공작 훈련, 그리고 미군과 합동 훈련에 매진했다. 특히 나는 물론이고 임정은 한·미특수훈련반(OSS) 훈련에 모든 걸 걸었다. 훈련 기간 동안 나는 장준하, 김선엽 등과 정보파괴를 위한 기술전법 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미국 전략첩보대와 연합으로 계획된 작전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로 진입해 일본을 몰아내는 것. ‘독수리 작전’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이 한반도 각지로 투입돼 미군 상륙을 위해 사전공작을 전개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다부진 결의가 담겨있었다.

한국광복군 활동 당시 송석형 애국지사(오른쪽)와 동료들의 모습. 송석형 애국지사 유족 제공

그 날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태평양 전쟁으로 광의에 찬 진군을 하던 일본군이 패퇴하면서 강대국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포츠담 선언)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임정 내부에서도 이미 미국과 광복군의 국내 진입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합의한 상태였기에 나와 동지들의 피 끓은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다. 1945년 8월 광복군에 국내 정진군을 편성, 내가 제2지구 충청도반에서 임무를 수행하게 됐으니 사실상 개시 명령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적의 항복은 예상보다 빨랐다. 어쩌면 우리 계획이 때를 놓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의 항복은 기쁜 소식인 것에 틀림없지만 우리에겐 씁쓸한 비보였다. 그토록 소원했던 우리 손에 의한 조국 광복의 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국 분단의 회복,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족 해방이자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작이지만 오늘 이 순간까지 뒤틀렸던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끝>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이 기사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시대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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