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내가 알고 죽을 수 있는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지만 내가 살던 지역에 무지한 것만큼은 지식의 무한함 때문이라 둘러대기엔 부끄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이제야 보이기 시작하는 숨은 보석들이 너무 귀해서 쓰다듬으며 적고 있다. 성심당에서 바라보면 길 건너 항상 있던 하얀색 건물이었다.

대흥동성당은 1919년 처음 천주교가 대전에 들어와 목동에 있다 대전역 시대를 준비하며 1945년 이곳으로 이전했다. 6·25를 지나며 그나마 있었던 건물이 폭격을 맞았다. 그 힘들던 시절 건축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임시 천막생활을 이어가다 1961년 착공, 그 이듬해인 1962년 완공됐다.

여기까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기록이다. 이제는 발품을 팔아 설명을 이어가야 한다. 성당은 반듯하게 하늘로 솟아있다. 지금은 높다할 수 없는 건물이지만 1970년대까지 대전에서 가장 높았다. 이창근 씨 설계로 고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지어진 건물은 신기하게 내부에 기둥이 없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외관만큼 건물 내부도 터져있다. 어느 성당을 가도 비행기 좌석마냥 3랑으로 나눠져 있고 기둥이 열지어 있어 숨어 졸기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대흥동성당에는 그 기둥이 한 개도 없다. 그러고 보니 입구의 비를 막는 케노피도 기둥없이 벽에 붙어있다. 그러다보니 하중에 문제가 생길까봐 부채접 듯 접어서 입구 눈썹에 부착했다. 놀라운 건축이었다. 고딕을 재해석한 신선하지만 기품있는 전개다. 갓 전쟁을 벗어나 지었다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내부에는 14면에 걸쳐 14처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고난이 표현돼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모던한 성당에 걸맞는 조화로움이 돋보였다.

1960년대 한국에 부임한 알렝드 브루통 신부는 성당 안쪽에 벽화를 그려뒀다. 그림 안의 사람들은 황토빛 머금은 조선사람을 닮아있었다. 종교는 마땅히 거하는 지역의 사람들을 안아내야 하니 이렇게 그렸던 듯 싶다. 그러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과는 생각이 맞지 않았는지 다 지워지고 두 점만 남아있다.

입구 캐노피 위로는 12제자 부조는 무명이었던 두 조각가가 젊은 날의 열정을 펼쳐놨다. 그들은 자라 공주대(이남규)와 서울대(최종태)의 교수가 됐다. 다시 봐도 놀라운 솜씨였다. 아직 연둣빛 예술가의 재능을 어떻게 알아봤을까. 이곳에서 놓치면 안되는 명품은 성모마리아 상이다. 얼핏 보면 발과 몸체는 수월관음을 닮았고 얼굴은 남자에 가깝다.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계신 상서롭게 예쁜 피에타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거친 성모상 같았다. 그러나 작가는 전쟁을 갓 마치고 뭐라도 이고지고 나가 고단한 하루를 이어가던 그 시절 어머니의 얼굴을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담았다고 말했다. 그러고보니 성모상이 어디서 많이 본듯하다. 성모상은 대전엄마들을 닮아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그 때부터 그리도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이 거리에서 일을 했거나 걸어본 사람이라면 12시와 7시에 들려오는 종소리에 추억을 가지고 있다. 9번씩 치는 종은 대흥동성당의 종탑에서 각각 세 개의 종이 3번씩 내는 소리였다. 50년에 걸쳐 종을 쳐온 사람은 놀랍게도 한 사람이다. 성지 순례를 다녀온 십년 전 몇 일을 제외하곤 한결같이 치셨다고 한다. 보좌신부님께서 대신 쳐줄테니 제발 다녀오라고 떠 밀어서 가게 됐고 그 기간에 ‘종소리가 도대체 왜 그러냐고, 누가 쳤냐’고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99계단을 오를 수만 있다면 평생 치겠다는 다부진 눈빛을 가지고 계셨다. 종소리에 대한 깊은 기억이 한사람의 선물이었다니 신기했다. 성지순례를 가서 보니 노트르담의 종소리보다 대흥동 종소리가 훨씬 아름답다고 말해 여러 사람을 뭉클하게 하셨단다. 조정형 님이시다. 종지기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여러 바퀴를 돌며 성당을 스토커처럼 지켜봤다. 이제 봐서 미안하고 또 죄스러웠다. 그 귀함을 인정받아 대전의 206번 째 등록문화재643호가 돼 어느덧 2019년 대전 천주교 100주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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