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호 대전 동구청장

 
황인호 대전 동구청장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숨기고 싶은 기억, 바로잡고 싶은 실수, 씁쓸하고 부끄러웠던 크고 작은 일들을 지우고 새로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때면 어딘지로 떠나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숨어들어 가고 싶어 한다.

나만의 숨겨둔 길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 곳, 대청호오백리길이 내 곁에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도 이 길을 먼저 지나간 족적을 따라 나만의 숨겨둔 대청호오백리길을 걷는다.

대청호오백리길은 대전·충청권 지역 대청호 주변 자연마을과 소하천을 모두 포함하는 약 220㎞의 도보길이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세 구간을 소개해 드리고 싶다.

먼저 대청호오백리길 3구간. 마산동 관동묘려 길목에서 1.4㎞ 대청호를 따라 걸으면 미륵원지(彌勒院址·대전시 기념물 41호)에 도착하게 된다. 미륵원은 고려말 회덕황씨 시조인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가 건립해 운영하던 것을 그 아들인 황수 등 네 아들과 손자 황자후까지 100여 년에 걸쳐 비영리로 운영한 사설 여관이다.

당시 대전지역에는 1개의 역(驛)과 8개의 원(院)이 있었지만 이곳은 공공관리들만 이용할 수 있었고 일반 나그네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미륵원은 이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행려자를 위한 구호활동을 벌였다. 미륵원은 대전 최초의 민간 사회복지시설이었다.

대청호오백리길 3구간에 동구가 꿈꾸는 관광 넘버원, 복지넘버원의 원형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무려 3대에 걸쳐 사회복지를 실천했던 명망 가문의 이야기와 고려와 조선을 관통하며 영호남과 한양을 오갔던 과객의 이야기를 짐작해본다. 고단한 과객과 희망을 잃은 행려자에게 과거의 미륵원과 현재의 동구는 무엇을 주었고, 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의 시작은 마산동 삼거리부터다. 추동방면으로 약 500m 걸어 내려가다 호반을 끼고 걸으면 '슬픈연가' 촬영지가 나온다. 마산동 정류장 삼거리 맞은편 호수변으로 걸어 들어간다. 대청호와 하늘의 불분명한 경계에 아찔한 햇빛이 비춘다.

파란 하늘을 하얗게 물들인 구름이 대청호 수면에 거울처럼 비치면 평온함이 밀려온다. 4구간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는 갈대밭길. 흐르는 바람과 흔들리는 갈대가 마음을 감싸 준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하고 요란한 무언가라기보다 아주 작은 틈새, 그 틈새 안의 흔들림 아닐까.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은 역사와 전통의 길이다. 폐고속도로 옆길 신상동에서 시작해 대청호 수변을 따라 조성된 길을 걸어 300m 걸으면 왼쪽으로 김정 선생의 묘와 재실이 보이는데 백골산성(白骨山城·대전시 기념물 22호)을 올라가기 직전 둘러보고 가도 좋다. 성의 서쪽으로는 백제의 계족산성이, 동쪽은 신라의 관산성이, 축조될 당시 신라를 마주보고 앞쪽은 금강이 흐르는 곳. 백골산성은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소 가파른 산길을 올라 백골산 정상에 오른다. 보상 없는 오르막은 없다. 남해의 다도해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한품에 들어왔다. 콧등에 맺힌 땀방울이 식는다. 5구간의 하이라이트답다. 백골산성을 지나 신촌동 절골로 내려와 삼거리를 건너 인근 식당 방향으로 걸어간다. 신촌동 반도 끝까지 걸은 후 다시 되돌아 나와 2차선 도로를 걸어 방아실 삼거리까지 걸어 나오면 5구간을 마치게 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샘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텍쥐페리 소설 '어린왕자'의 한구절처럼, 우리 대전이 아름다운 것도 바로 대청호라는 보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려한 대청호의 탁 트인 전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느낄 수 있도록 추동길의 마산동과 오동길 사성동을 잇는 700m 길이의 대청호 관광인도교가 설치된다면 대청호오백리길은 대전의 대표명소, 아니 세상에서 가장 걷고 싶은 길이 될 것이다.

여행을 한다는 건 길을 걷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정복하지 말고 이 순간 그대로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동구에는 역사를 만나고, 전통을 생각하고, 낭만을 찾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길이 있다. 가지고 있는 양말 중에 가장 푹신한 녀석을 골라 신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동여매자. 걸을 준비를 마쳤다면 떠나보자. 대청호오백리길, 우리도 미처 몰랐던 그 아름다운 동구8경의 비경(秘經)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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