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날 찾은 대청호는 은은한 수묵화와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꿈속에서 본듯한 아련한 풍경에 마음이 젖는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사람에게도, 동·식물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음식물 없이 45일 이상을 살 수 있지만 물 없이는 6일 정도를 살 뿐이다.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리핀 인근에서 발생한 제5호 태풍 ‘다나스’와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장맛비가 내린 지난 주말, 비온 뒤 만난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찬샘마을길)에는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신록(新綠)의 계절에 만났던 그 나뭇잎들의 초록빛은 한층 진해졌고 보다 풍성해졌다. 물과 함께 생장의 필수 조건인 햇빛을 받기 위해 옆으로, 옆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새다. 전에는 길옆에서 다소곳이 서서 길손을 보호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길 위로 올라와 자신의 위용을 뽐낸다.

 

 

넝쿨식물과 푸른잎이 돋아난 이현동생태습지 정겨운 모습이다.

 

찬샘마을길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이현동생태습지부터다. 봄바람과 함께 파릇파릇한 새싹으로 가득했던 이현동생태습지는 어느새 한껏 자라난 녀석들을 만날 수 있다. 지지대를 타고 성장한 넝쿨 식물과 푸른 잎이 돋아난 억새도 보인다. 멈춰있지 않은 자연의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자에 앉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신비함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바람에 잎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행진곡 삼아 발걸음을 옮겨 시골길을 따라 걷다보면 체험마을로 유명한 찬샘마을이 나온다. 지난 봄 모내기하던 이들로 가득했던 논에는 어느새 키가 훌쩍 자란 벼들의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다음에는 황금빛을 물든 논을 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고즈넉한 시골 마을 풍경을 눈에 담으며 이제는 푸른 빛 무성한 성치산 방향으로 걷는다. 전날 내린 비로 길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고 땅에도 물기가 가득하다. 걷기에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나 물웅덩이를 굳이 밟고 지나갔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며 입가에 미소가 맺힌다. 장화 하나면 무서울 게 없던, 물웅덩이를 밟고 ‘꺄르르’거렸던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 탓이다.

 

2구간 전망좋은곳에서 성치산성으로 내려오는 길 마주한 풍경.

 

 

지난 2004년 보호수로 지정된 부수동 느티나무를 지나쳐 ‘대청호 전망 좋은 곳’에 다다랐다. 찬샘마을길에서 대청호를 가장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귓가를 간질이는 물소리와 눈앞에 펼쳐진 비경은 이곳이 괜히 전망 좋은 곳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조금 아쉬운 점은 푸른 대청호와 다르게 하늘엔 아직 회색빛구름이 가득하다는 것뿐이다. 이제 찬샘마을길에서 가장 난이도 높은 성치산성을 향해 걸을 시간이다. 해발 219m 성치산. 이름에 ‘악’자가 들어간 산들만큼은 아닐지라도 가벼이 볼 수 없는 산이다. 특히 등산 초심자에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나무들의 도움을 받아 오르고 또 오르다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곳에서 바라보는 대청호의 아름다움은 이전의 힘겨움을 삽시간에 날려 보낸다. 이제는 찬샘정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옛날부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얼음처럼 차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찬샘이 있는 마을이라는 찬샘내기(냉천동, 냉천골)에서 찬샘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대청호반과 천혜의 자연경관이 조화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신선한 고향 향기를 전해준다. 특히 대청호에 마을이 잠긴 실향민들에게는 마을의 향수를 전해준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찬샘정에 앉아 대청호를 바라보면 눈길 닿는 곳곳이 모두 그림이 된다는 거다. 푸른 대청호와 겹겹이 놓인 산과 드넓은 하늘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게 없다. 먹구름이 가득한, 햇살이 부족한 이런 날에는 한편의 수묵화처럼 느껴진다.

 

울창해진 나무와 풀들 사이로 보이는 호수.

 

이제는 찬샘마을길 마지막인 냉천종점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은 성치산 구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편안하지만 찬샘정 이후 구간은 특히 더 편하다. 왼편에 대청호를 두고 시골길을 걸으면 끝이다. 제법 울창해진 나무와 풀들이 시야를 막기도 하지만 이 또한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구불구불한 길과 시야를 제한하는 나무와 풀들 사이로 탐험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글·사진=조길상 기자 pcop@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