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처음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이 공개된 이후로 11년이 지난 지금까지 상주본을 둘러싼 분쟁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처음 상주본을 세상에 공개한 배익기 씨와 골동품 판매자 조 모 씨 간의 소유권 분쟁은 조 씨의 사후 배 씨와 국가 간의 갈등으로 확대됐다. 상주본을 국가에 반납하는 조건으로 감정가의 10분의 1인 1000억 원을 요구하는 배 씨와  법원 판결로 상주본의 소유권과 회수 강제집행 권한을 인정받은 문화재청은 별다른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고 대치 중인 상태다. 31일 CBS 라디오를 통해 배 씨가 기존 입장과 다른 타협안을 제시하면서 협상에 진전이 보이는 듯하나, 함께 출연한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상주본의 훼손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상주본 소지자 배익기씨, 작년 18년 10월 국회에서 질의 답변 중 = 연합뉴스

  훈민정음은 1446년 세종대왕에 의해 창제되었다. 크게 ‘예의’와 해례‘로 구성되는데, 예의는 세종대왕이 직접 지었으며 한글 창제 이유와 사용법 등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해례는 훈민정음의 한문해설서인데, 성상문, 박팽년 등 한글 창제에 함께한 집현전 학자들이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 등을 설명했다. 훈민정음은 예의와 해례가 모두 포함된 해례본과 예의만 기록한 예의본으로 나뉜다. 이중 해례본은 국보 제70호로 지정됐으며, 1987년 1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례본은 현재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간송본(안동본)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상주본, 두 부가 알려져 있다. 당초 여러 부가 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간송본은 발견 당시 경북 안동군의 이한걸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훗날 이를 입수한 간송 전형필 선생은 6.25전쟁 피난을 떠날 때에도 간송본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보존하였다. 현재 간송본은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주본은 2008년 경북 상주시에 거주중인 배익기 씨가 집을 수리하던 중 해례본과 같은 판본을 발견했다며 공개됐다. 그러나 공개 이후 같은 지역 골동품 판매자인 조모씨가 “배 씨의 해례본은 자신의 가게에서 훔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유권 분쟁이 발생한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조 씨에게 해례본의 소유권이 있다고 최종 판결했다. 이듬해인 2012년 조씨가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부하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상주본의 소유권은 국가로 넘어가게 된다.
상주본의 정확한 행방은 배 씨만 알고 있어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상주본의 회수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배 씨가 헌납 조건으로 상주본의 감정가 10분의 1인 1,000억 원을 요구하면서 배 씨와 문화재청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위의 판결 이후 배 씨는 문화재청을 상대로 상주본 강제인도 청구이의 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됐다.

불에 그슬린 훈민정음 해례본 = 배익기씨 제공, 연합뉴스

  이후 상주본은 지난 2017년 4월 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 국회의원 재선거에 배익기 씨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서 재공개됐다. 지난 2015년 3월 배 씨의 집에 화재가 발생해 상주본의 훼손 가능성이 제기되어왔는데, 실제로 공개된 상주본은 불에 그을려 손상된 상태였다. 첫 공개 당시 상주본은 간송본에 비해 보존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두 번째 공개 이후로 상주본의 보관 상태 및 행방에 큰 관심이 쏟아졌다. 문화재청은 상주본 회수를 위해 꾸준히 배 씨를 찾아갔으나 “협상에 진전이 전혀 없다”며 “우선 상주본의 상태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겠다”고 답답한 심정을 밝혔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 연합뉴스

  지난해까지 배익기 씨는 “국가가 아니더라도, 돈 많은 기업이나 민간이 자신에게 사례한 뒤 국가에 기부하는 방법도 좋다”고 밝히며, 기존 요구대로 1000억 원의 보상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실제 국가가 배 씨에게 사례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은 법적으로 1억 원 뿐이어서 협상은 결렬되어 왔다. 그런데 지난 3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배익기 씨가 소유한 훈민정음 해례 상주본이 전체 33장 가운데 13장밖에 남지 않았다는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배씨를 압박했다. 안 의원의 주장에 배씨는 정확한 장수를 밝히기 거부하면서도 “13장보다는 많을 것”이라며 애매하게 답변했다.
  추가로 1000억 원을 고집해왔던 배 씨는 진상조사를 통해 자신이 상주본을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혀준다면 상주본의 재감정평가에 응할 수 있다는 뜻을 비쳤다. 이에 안 의원이 “13엽(장)뿐이라면 10억 원 정도밖에 가치가 안 될 수 있다”며 “배 씨가 추천하는 전문가, 문화재청과 국회가 각각 추천한 전문가를 포함한 객관적인 감정평가 위원회를 구성해 상주본을 재감정하자”고 제안했다. 배 씨는 즉답을 피하며 “모든 것이 순리적을 풀리고 원칙적인 일이 해결되면 자동으로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1년간 1000억 원을 주장해왔던 배익기 씨의 심경변화는 상주본의 보존 상태에 대한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상주본의 가치가 훼손되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상주본을 인질로 삼고 배 씨가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위 방송에 배 씨와 함께 출연한 안민석 의원은 “이번 일을 계기로 국가 소유의 문화재를 불법 은닉하고 훼손할 경우 강력 처벌할 수 있도록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할 것”이라며 “한글날 전에 상주본이 국가로 반납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진호 대학생 기자 admi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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