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진마을 입구에 가을의 전령 하얀 억새가 춤을 추고 있다.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이 느껴진다.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바람도 그렇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도 알 수 있다. 도심에서도 가을이 오고 있음이 감지되는 데 대청호에선 어떠랴. 9월의 끝자락에 찾은 대청호오백리길 5구간(백골산성낭만길)은 은빛의 갈대와 단풍이 들기 시작해 울긋불긋한 색으로 변모하고 있는 중이다. 벚꽃 잎의 하얀색으로 물들었던 올 봄과 눈부신 녹음을 선사해준 여름에도 어김없이 아름다웠지만 이번 방문 역시 마음속에 또 다른 감동을 전해준다.
신상교 인근 흥진마을 갈대밭 추억길에서 발걸음 내딛기를 시작한다. 대청호를 왼쪽에 두고 자신의 계절을 알리듯 위용을 뽐내는 억새와 갈대를 감상하며 푹신한 느낌을 주는 흙길을 걷는다. 봄과 여름, 가물었던 대청호도 찰랑찰랑 넘칠 듯 말 듯 차오른 물 잔의 모습처럼 한껏 불어난 모습이다. 청명하게 맑은 파란 하늘과 사계절 변함없이 짙푸른 대청호, 은빛의 갈대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낭만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만큼 절경을 이룬다. 흥진마을 갈대밭 추억길은 3㎞ 남짓으로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리지만 주변을 돌아보며 걷다보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

 

가을길목에 찾은 5구간은 가을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현재의 신상교가 지어지기 전부터 흥진마을민이 작은 하천을 건너기 위해 쓰였던 이름이 같은 ‘신상교’를 건너 바깥아감으로 나아간다.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생긴 산을 마을 사투리로 ‘아감’으로 불렀다는 것부터 유래해 흥진마을을 아가미산 안쪽에 있어서 안아감, 흥진마을 바깥은 아가미산 바깥에 있다고 해 바깥아감이라고 부른다.
바깥아감을 지나면 이름부터 무시무시한 백골산이 등장한다. 대청오오백리길에서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다. 언뜻 보기엔 높아보지도, 가팔라보이지도 않아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걸어보면 알 수 있다. 왜 백골산이라 불리는지를 말이다. 길쭉길쭉 위로 솟은 나무들로 햇살이 많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숨이 턱밑에 걸린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며 내가 살아있음이 매우 강하게 느껴질 즈음 시야를 가로막던 나무가 사라지면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하는 정상을 만날 수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대청호의 광활함이 앞선 피로감을 날려준다. 과거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기 힘든 백골산성이 기념물 22호로 지정됐음을 알리는 표지가 유난히 쓸쓸해 보여 가슴 한편에 아릿함을 간직한 채 하산을 시작한다.
절골로 나와 이제는 방축골을 향해 갈 시간이다. 매번 느끼지만 어린 시절 시골의 모습이 떠오르는 길을 따라 주변을 감상하며 걷는다. 급할 것 없이 좌우를 돌아보며 한적함을 느낀다. 휘황찬란하고 시끌벅적한 도시도 매력이 있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시골 또한 그만의 맛이 있다.

 

불어난 물에 길을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산행 도중 만난 밤송이
은빛억새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방축골에 도착해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불어난 물에 길이 끊겼다는 소식이다. 알려주는 대로 다시 돌아가는 게 맞지만 청개구리 심보가 터져 나와 걸을 수 있는 곳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밤나무 밑으로 입을 한껏 벌린 밤송이를 만나고 물이 불어남을 슬퍼하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니 역시나 수위가 높아진 대청호는 길손의 발을 멈춰 세웠다. 고작해야 50m쯤 될 법한 길이 물 아래로 잠겨 버린 것이지만 날아갈 수 없는 인간인 탓에 왔던 길을 돌아나가야 한다. 도로를 따라 걷다 가을의 전령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에 입가에 절로 웃음에 맺힌다. 되돌아가는 길이지만 코스모스 탓인지 아쉬움은 덜하다.
방아실 입구까지 남은 5구간은 조금 심심한 감도, 밋밋한 느낌도 있지만 천천히 걷다보면 방전됐던 마음이 다시금 차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아름다운 자연이 주는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사진=조길상 기자 pcop@ggilbo.com

 

파란 가을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코스모스와 억새, 붉게 익어가는 감까지 5구간은 가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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