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도 시인 전홍준, 시집 ‘눈길’ 출간

전홍준 시인

 

 

 

허물 벗은 발톱과 껍질이 단단해지는
뻘밭 구멍이 보이고
그 구멍에 손을 집어넣으면
게가 이고 온 고통의 무게가
덥썩 내 손을 잡는다
온몸이 번쩍 눈 뜬다

-‘돌게’ 중에서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분다. 쓸쓸한 낙엽이 떨어지는 스산한 가을이 가면, 어김없이 춥고 시린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숲으로 우거진 충남 태안의 고요한 섬 안면도가 고향인 시인 전홍준(55). 그가 첫 시집 ‘눈길’(도서출판 애지)을 출간했다.

‘눈길’엔 바다와 파도의 허기를 뼈에 새기는 시편 50편이 묶여 있다. 그 허기는 곧 삶의 허기일 터, 그러나 요란한 수사와 수다가 없다. 메시지를 앞세우지 않는다. 시인의 마음을 두드리는 사물과 사람을 보듬다가 마지막 한마디 넌지시 건네고 빠진다. 그래서 여운이 깊다. 이처럼 말없이 많은 말을 건네는 재주를 지니고 있는 그는 담백하고 순정한 서정의 결이 무엇인지, 단순한 힘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줄곧 고향 언저리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는 시인에게 섬과 바다는 생활의 터전이고,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보이는 섬과 바다가 그에겐 엄혹한 현실임을 ‘눈길’에 실린 작품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물과 바람으로 표상되는 그의 시 쓰기는 비린내 나는 선창가, 기름에 덮여버린 바다, 불빛도 희망도 땡겨 쓴 선급금도 쉴 날 없이 몸으로 버는 경매사, 빚에 시달리는 어촌 사람들, 전국 각지에서 고향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상처의 길을 따라 눈 뜨고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지난 2005년 ‘문예연구’로 등단했고,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홍준 시인은 “첫 시집 출간이 많이 늦었다. 시집 원고를 가만 들여다보니 물, 바람, 파도를 곁에 두고 살아왔음을 새삼 알게 됐다. 오늘 밤에도 파도는 오래 뒤척거린다. 지난날이 남긴 허기를 뼈에 새기는 모양이다. 그렇게 새벽이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벽은 아직도 내게 멀다”라고 ‘눈길’을 상재한 소회를 밝혔다.

최 일 기자 choil@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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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눈을 번쩍 뜨는 안면도의 詩

-전홍준 시집 ‘눈길’을 읽고

이병초(시인, 웅지세무대 교수)

전홍준 시인의 첫 시집 『눈길』을 펴자마자 갯비린내와 파도소리가 시 편편에 감긴다. 안면도라는 섬의 특수한 환경이 시인의 따뜻한 눈길에 포획되는 순간 안면도의 일상은 삶의 오랜 때깔을 빛낸다. 하지만 그의 시는 섬에 간직된 비밀스러운 얘기나 신비로운 사실을 물고 있기보다는 사람살이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화자를 통해 늘 뭔가를 만져보거나 쓰다듬고, 입 다물고, 움츠리면서 섬사람들의 면면을 되짚어본다.

시적 화자로 표면화된 섬사람들의 삶은 불편하고 서늘하다. 그러나 전홍준의 시에 녹아든 삶의 행위는 ‘뜨거움의 손 시림’(「겨울」)처럼 혹한의 겨울을 견딤과 동시에 한 개인의 생애도 역사일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이 삶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문명의 그늘에 가려진 인간의 삶은 되레 좁아졌다는 속앓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그의 시는 사회역사적 담론에 소모적으로 부역당하지 않음은 물론 시의 우주적 상상력이라는 별 소득 없는 말에도 관계가 없다. 그의 시집 『눈길』에 수록된 시편들 속에는 한 자연인이 견디어 온 시간의 내력이 단단하게 응축되어 있을 뿐이다.

물 빠진 바다가 우물 하나 파 놓았다

종일 조개를 파고 돌아올 때

몸에 묻은 뻘 물 밑에 가라앉히고

간 들인 몸도 함께 가라앉아

따로 물을 쓰지 않았다

씻고 빨고 닦아야 하는 것들을

사람들은 항상 이곳에 내맡기기도 했고

바다로 나갔다 삼동네 마을 아낙들이 겨울바람에 뒤집혀

줄초상 났을 때도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이 둠벙 속으로 떠밀려 와서

몸 대신 가라앉기도 했다

-「둠벙」 전문

섬사람들이 종일 조개를 캐고 집에 돌아가면서 몸과 도구를 씻는 곳이 둠벙이다. 화자는 둠벙 물에 몸을 씻기 전에 ‘파 놓고, 파고, 돌아오고, 가라앉히’는 행위를 먼저 보여준다. 둠벙에 ‘씻고 빨고 닦아야 하는 것들을’ 내맡기며, 소금기 밴 몸을 이끌고 둠벙 속에 들어가기도 하며 하루치의 노동을 정히 갈무리한다. 그러나 둠벙은 고맙거나 정답지만은 않다. 어느 겨울 세찬 바람에 배가 뒤집혀 삼동네 아낙들이 줄초상이 났을 때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떠밀려 와서 ‘몸 대신 가라앉’았던 비극적인 곳이므로 그렇다. 둠벙은 비통한 기억을 물고 있는 장소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둠벙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바다’가 섬사람들에게 원(怨)을 심어 주려고 둠벙이란 우물을 파놨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둠벙은 이 지점에서 삶과 죽음의 기억이 공존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된다. 한순간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 시상(詩想)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가슴 속에 둠벙 한 개씩은 파놓고 산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더구나 ‘바다로 생을 번 신발이’ 둠벙에 몸 대신 가라앉는다는 한(恨)의 정서는 오래오래 서늘하다. 한(恨)은 슬픔의 무늬를 간직한 그늘의 색채가 있지만 그것은 원망의 응결체가 아니라 삶의 비극성까지를 긍정적으로 품어주는 웅숭깊은 지혜 아닌가. 원통절통한 사연에 얽매여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게 원(怨)이라면, 뼈마디가 녹아들 법한 개인의 불행을 위로해주고 삭혀주는 윤리적 조절장치이자 삶을 살도록 북돋워주는 정서가 한(恨)의 미학 아닌가 말이다.

안면도는 애초에 섬이 아니었다가 억지로 섬이 되었으며 콘크리트 다리가 놔지면서 다시 육지로 연결된 섬이라고 한다.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아 보이는 여기에 뿌리를 둔 전홍준의 시는 오늘의 한국시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할 여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의 시편들에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즉물적 인상이 적고 한국인이 간직해온 어법이 시에 발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명적 색채를 짙게 드러냄으로써 문명의 이기성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시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못 벗어날 것 같은 느낌이 되레 강해지므로 그렇다.

유쾌하지 못한 이런 생각을 고르게 펴주는 전홍준의 시는 평온하고 단단하다. 안면도에서 태어나 그 근처를 벗어난 적이 없는 여정,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배고픔의 긴 공복이 자리 잡을 뿐’(「겨울」)일지라도 그의 시편 곳곳에 언표되는 행위들은 오래된 것들을 따뜻하게 매만져주는 한의 정서처럼 정답다. 언어를 폐기하려는 과정인가를 따져볼 정도로 시의 문맥을 고의로 훼손해버린 일부 시를 이해하려다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전홍준 시가 더 값지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그의 시는 뭔가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어떻게 사는 게 아름답게 사는 삶인지를 사람살이의 연속성을 통하여 체득해 갈 것이다

이병초 시인

*이병초 약력: 전북 전주 출생. 1998년 《시안》으로 등단했고, 시집으로 『살구꽃 피고』 『까치독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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