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섭 정치교육부 기자

이준섭 정치교육부 기자
한국 근·현대사에서 10월 26일은 70년을 사이에 두고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그날’로 남아있다. 모두 권총 하나에서 비롯됐다. 1909년 “코레아 우라”를 외치며 일본 제국주의 심장에 총을 겨눈 이가 있었고, 1979년 궁정동 안가에서 총에 맞은 채 “난 괜찮아”라는 짧은 말을 남긴 이가 있었다. 11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 그리고 40년 전 권력의 핵심이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저격 당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얘기다.
 
10월 26일 안 의사의 저격과 박 전 대통령의 서거, 그날 중 우리에겐 어떤 사건이 더 중요할까? 역사를 어느 관점에서 어떻게 보고 평가하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두 사건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비교할 건 아니다. 하지만 두 사건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과 교훈은 실로 엄청났다.
 
안 의사는 일제의 법정에서 “나는 과연 큰 죄인이로다. 착하고 약한 나라의 백성인 죄인이로다”라고 자탄했다. 그 말 속에 담긴 함의는 남은 우리가 강한 나라, 독립된 나라에서 주권을 갖고 평화를 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듬해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뒀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달라”는 짧은 유언을 끝으로 이승과 작별했다.
 
70년 뒤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서거는 18년간 이어온 장기독재의 몰락과 그 스스로 ‘한국식’ 민주주의로 정의내렸던 유신정권 붕괴로 귀결된다. 하지만 민주의 회복을 고대한 민중의 바람은 아이러니하게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또 다른 군사정권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런 까닭에 우리 현대사에서 박정희시대의 종언은 사실 비극적이고 극단적이라는 양면성 또한 지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리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근대화의 주역부터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주의 발전을 후퇴시킨 군사독재의 상징으로 엇갈리는 이유가 여기 숨어있다.
 
돌이켜보면 선택의 여지 자체를 두지 않았던 안 의사와 달리 박 전 대통령에겐 기회라는 게 있었다. 1979년 그의 독재에 항거하며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시위 ‘부마항쟁’ 때가 그랬다. 그의 서거 딱 일주일 전인 10월 19일 김재규는 새벽 비행기로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 시위 전개 상황을 직접 보고 돌아왔다. 단순한 소요라 생각했던 그의 눈엔 자발적으로 시위에 나선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격려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포착됐다. 시위가 일부의 분노가 아님을 확신한 그는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보고하고 대처할 것을 건의했다. 시위의 원인이 장기 집권, 세금 인상, 야당 총재(김영삼)의 제명이라고.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알지도 못한 채 “앞으로 부산, 마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라고 호통을 쳤단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말을 들었다면, 그 쓴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70년을 사이에 둔 그날 한 사람은 남아있을 이들을,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믿었다. 내가 그들이라면 10월 26일 어떤 선택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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