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자 이순복 대하소설

흑망판은 글자가 말해 주듯이 사람이 사는 집이 없고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 벌판 넘어 언덕바지에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음산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벌판과 숲속은 고요하기 짝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괴이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장빈일행은 날이 저물자 갈 바를 모르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였다. 버들나무 숲속에서 고각소리를 울리며 괴도의 무리가 나타났다. 앞선 괴인은 8척 장신으로 범의 수염과 같은 턱수염이 빽빽이 돋았는데 누런 수건을 쓰고 있었다.

녀석은 2자루 개산활부를 들고 허리에는 쌍칼을 꽂고 있었다. 그 뒤에는 9척 장신으로 검은 수염이 얼굴에 가득한 곰과 같이 생긴 건강한 괴한이 있었다. 그는 대도를 들고 어깨에는 활을 매고 있었다. 그 괴인 뒤로 100여 명의 괴도들이 병장기를 들었는데 하나같이 불량해 보였다. 앞장 선 괴인이 달려오며 벽력같이 크게 외치기를

“무엇을 하는 놈들이냐? 냉큼 가진 물건을 모두 내어 놓아라!”

기세등등하게 다가오자 장빈은 아주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이들 괴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한중의 장사치요. 난리 통에 밑천을 몽땅 털리고 진주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오. 가진 것이 없어 저녁 요기도 못했소. 장군께서는 우리 같은 장사치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장빈이 괴수를 장군이라 높여 불러 주며 말했으나 괴수는 장빈의 말 따위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작정 도끼를 휘두르며 먼저 장경에게 달려들었다. 장경은 잽싸게 물러서며 허리에 꽂은 단도를 뽑아 들고 괴수를 대적했다. 이런 위급지경을 본 장실이 동생을 보호코자 재빨리 단도를 뽑아들고 장경을 도우러 나섰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장빈이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장군은 어찌하여 신분에 맞지 아니한 행동을 하시오. 병장기도 갖지 않은 타관의 장사치에게 이다지도 사납게 구신단 말이오. 어서 무기를 거두시고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괴수는 장빈이 열성적으로 목숨을 빌자 대답하기를

“나는 목숨에는 관심이 없다. 가진 물건을 원할 뿐이다. 어서 물건을 몽땅 내 놓아라. 만약 나를 속이려 들면 이 도끼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이런 무례한 말에 황신이 괴수의 간악함을 읽고 몸에 지닌 단도를 꺼내 휘두르며 괴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자 9척 장신 괴수가 큰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자 졸개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장빈일행을 둘러쌌다.

장실과 장경은 무기가 부실하여 괴수와 싸우기 힘들어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이와 같은 비세를 바라보던 급상이 등에 업은 석늑과 보따리를 장빈에게 맡기고 조개와 더불어 요도를 뽑아 들고 싸움판으로 뛰어 들었다. 장경과 황신이 괴수에게 밀리다가 이들이 도와주자 전세는 차츰 유리해지는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다. 지척지간에 한 떼의 괴도가 와~ 소리를 내며 몰려와 장빈일행의 보따리를 잽싸게 약탈해 달아났다. 달아나는 괴도들의 함성이 와~하며 흑망판에 멀리 메아리쳤다.

장경은 보따리를 빼앗기고 괴도와 싸우느라 몸을 뺄 수 없는데 급상에게 위급상황이 닥쳤다. 그것은 장빈에게 맡겨둔 석늑과 보따리를 또 다른 괴도가 둘러메고 달아난 것이다. 급상은 어찌해야 좋을지 마음이 급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참 싸우던 괴수를 버려두고 눈에 쌍불을 켜며 석늑을 매고 달아난 괴도의 뒤를 쫓으며 소리치기를

“이놈들아, 물건은 가져가도 사람은 두고 가거라.”

“이놈아, 웬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

급상의 말을 받아 대꾸하며 또 다른 괴도가 급상을 가로 막고 싸움을 걸었다. 급상은 억지 싸움을 다시 한바탕 치르고 혈로를 얻었으나 석늑은 찾을 길이 막막하게 되었다. 이제 100보 앞도 구분하기 어렵게 어두워 졌다. 캄캄한 밤길이지만 급상은 마음이 급하여 괴도가 달아난 방향만 대충 짐작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급상은 온 힘을 다하여 더욱 힘차게 어둠을 뚫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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