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이은영 옹을 만나다
아흔의 참전용사가 겪은 70년 전 6.25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노력이 뜨겁게 전개되고 있다. 지난 2017년 이후 남북관계의 훈풍이 불며 북핵문제 해결에 기대감이 돌기도 했으나 최근 북한은 다시 ICBM발사 조짐 등을 보이며 한반도를 시계제로의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 같은 위기 속 발발 70년을 맞이한 비극적인 6.25전쟁의 교훈은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평화가 언급되는 세상에서 희석돼 가는 전쟁의 참혹함, 그러나 한 참전용사가 겪은 전쟁사는 다시는 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로 가기 위해 우리사회가 지향하고 준비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듯 하다.

◆자원입대했던 청년이 마주했던 6.25
 

이은영(90) 옹은 지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에서 비롯된 사변의 순간을 오롯이 기억한다. 이 옹은 “그 당시 (부대는) 일요일이면 경비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전부 외출을 보냈다. 보통 토요일 외출을 보내는데, 난 잘 때가 없어서 토요일 부대서 자고 일요일 외출을 준비하고 있었다”며 “일요일 아침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북한 인민군이 남침을 했다는 것이었다. 민간인 차에 의해 외출을 나갔던 병력들이 부대로 돌아왔다.”

이 옹은 6.25전쟁 1년여 전인 1949년 7월경 자원입대했다. 당시 채 스무살도 되지 못했기에, 처음에는 입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입대를 하고픈 마음에 나이를 속였고, 당시 지원병은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분위기에 힘입어 창설부대에 가까운 육군독립기갑연대(제1기갑연대)에서 복무를 할 수 있었다.

충남 부여에 살던 그가 고향을 벗어나 서울의 한 부대에 입대하게 된 배경엔 ‘취직’이라는 단순하면서도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한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미래를 고민하던 중 ‘군에 입대해라. 경우에 따라서는 앞길 괜찮게 나갈 계기가 될 것’이라는 주인장의 조언에 적잖게 영향을 받았다. 그런 청년의 눈 앞에 전쟁, 폭탄이 떨어졌다. 총을 든 인민군들이 남으로 쏟아져 내려온 것이다.

“그때는 남북이 갈라졌다는 것만 알지 북한에 대해 몰랐어. (군에서도) 북한에 대해 교육도 안 하고 있었으니 자연히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 몰랐지. 북에 대해 전쟁 전까지 적개심 같은 건 없었는데, 전쟁이 나고 모든 것이 변했어. 인민군의 포가 김포 시내에서 터졌지. 그때부터 북한에 적개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조국에 대한 애국심도 들었다오.”

이 옹이 속한 육군독립기갑연대, 그리고 국군이 김포 등지에서 분전했지만, 인민군에 의해 급기야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만다. ‘왜 기습 남침을 해서 같은 민족끼리 비극을 일어나게 했나’라는 분노가 일었다는 게 이 옹 회상의 한 줄기다. 그는 “(서울 함락 후) 인민군들이 국군을 패잔병 취급하는 상황에서, 우리 부대원들은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2~3명 씩 조직해 비행장을 침투, 인민군을 포로로 잡아왔다. 죽을 줄도 모르고 적을 잡아왔을 정도로 분개하는 마음이 컸다”고 분연히 말했다.

이후 인민군이 주변 해변으로 상륙한다는 소식에 이 옹의 부대는 후퇴했다. 후퇴와 방어를 하는 과정에서는 안타까운 경험도 있었다. 외국 아군 비행기가 오는 것을 반가워 한 중대장이 장갑차에서 나와 손을 흔들었는데, 그 전투기가 사격을 해 전사했단다. 이 옹은 “나중에 알고 보니 한강이북에 있는 부대는 인민군이라고 판단하고 사격을 한 것 같다”며 “좋은 지휘관이었는데 안타까웠다. 그렇게 밑으로 내려오는 동안 이리저리 공격을 받았다. 전투 초기의 혼란이 있었다. 당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지휘관들도 몰랐을 거다”라고 말했다.

◆동족에 대한 적개심에서 동족애를 갖기까지
끝없는 후퇴 속 고향 인근 백마강을 건널 때는 가족들 생각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그는 “피난민들이 못 건너오는 것을 보고 작은 아버지가 면장을 하고 아버지나 형이 마을에서 직책이 있었는데 우리 집은 멸족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더 적개심이 들었지”라고 말했다.(이 옹의 가족은 다행히 산으로 피신해 화를 면했다)

낙동강에서의 전투는 사투라 일컬을 만큼 처절했다. 서울과 대전 등을 함락한 후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인민군의 공격은 발악이라고 할 만큼 거칠었다. 이 옹은 팔공산 전투에서 수 일 동안 적과 맞서 싸웠다. 이 과정에서 대대장이 북한 저격수 총탄에 피격돼 전사하는 일도 겪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 옹을 비롯한 국군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버텼다.

그런 셀 수도 없이 많은 하나하나의 신념들이 이 땅에 아로 새겨질 때,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인천을 기점으로 한 상륙작전이 성공해 반전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 옹은 ‘자세한 전황은 알 길 없었으나 북진을 하며 사기가 충천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인민군에게 당했다가 복구했다는 승리감이 가득했다.

북진과정에서 동족애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 옹은 “쫓겨 내려갈 때는 비참하고 했는데, 인민군을 쫓아 북 할 때는 마음이 커지고 넓어졌다.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며 “미국은 패잔병을 잡으면 포로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부대에서) 패잔병의 고향을 물어본 다음 남쪽 지역이면 ‘빨리 돌아가라’고 돌려보냈다. 의용군으로 잡혀간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아닌 끝을 맺을 때까지 이 옹은 김포에서 팔공산까지, 그 후 나진으로 진격했다 돌아오기까지 약 1400㎞를 이동했다고 귀띔한다. 지난 1968년 중위로 전역한 후 20여 년을 국가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던 이 옹은 현재 6.25참전유공자회 대전 서구지회장을 맡고 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 없어야...
이 옹은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한다고 강조한다. 평화를 위해선 과거 남침한 쪽이 자신의 죄를 확실히 인식해야 하며, 그 뒤에야 용서가 가능하다고 전제했다. 한반도 평화와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혜안을 묻는 질문에 “내가 정치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육 분야에서 연구한 것도 아니지만 공산주의를 겪은 한사람으로 절대로 공산주의와 타협을 하려 해서는 안 된다. 북한하고 회담하고 평화가 오면 좋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북한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은 현재의 방식을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며 “내가 겪은 공산주의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런 것을 조금이라도 인식할 수 있는 젊은 세대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육계나 3040세대는 이런 부분에 대한 관심이 없는 듯 하다”고 탄식조로 말했다.

이 옹은 인터뷰의 끝에서 ‘나라가 가난하면 항상 외침을 당한다든지, 어떤 식으로든 당할 수 있구나 항상 느낀다’고 말하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당부했다. “우리사회가 북한으로부터 (6.25 등의) 해코지를 당하면서도 경제발전을 하고 잘 사는 나라가 됐다는 자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게 아흔의 참전용사가 우리사회에 당부하고픈 일성이다.

곽진성 기자 pe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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