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대전새미래초 교사

 

“○○가 나보고 거미라고 했어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일렀다. 친구를 거미라고 부른 이유는 파카에서 빠져나온 하얀 깃털 때문이었다.

“실내화 새로 샀니?”

“으음, 엄마가 비닐에서 꺼내줬어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지 못해 잠시 멈칫했다. 아, 실내화를 샀다는 말이구나! 이내 알아채고 웃었다.

“어제 겨울왕국을 보러 갔는데, 깜짝 놀랐어요.”

“왜?”

“영화가 영어로 나왔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아저씨가 고쳐서 우리말로 나왔어요.” 아이의 어투와 표정으로 봐선 정말 놀란 게 분명했지만, 난 웃음이 나왔다.

옷에서 빠져나온 하얀 깃털을 보고 거미를 떠올리고, 앞뒤 염두 없이 자기가 본 대로만 말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풍부한 감정이 터져 나오는 아이들.

점심 먹으러 가기 위해 깨끗이 씻고 나온 손으로 급식실 가는 길에 스치는 벽이나 난간을 죄다 문지르면서 손 씻은 이유를 무색하게 만든다. 길을 갈 때도 그냥 가는 법이 없다. 팔을 휘돌리거나 소매를 길게 빼내어 흔들기도 하고, 다리로 가위 치기를 하면서 걷는다. 그러다가 친구끼리 서로 얽혀서 다툼이 일어난다. 두 발로 모둠 뛰면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은 그냥 보고 넘길 수 없게 한다.

아이들은 왜 가만히 못 있을까? 부산스러운 행동으로 언쟁을 일으키고 꾸중을 자처하는지…. 한결같은 그들의 모습이 궁금하다. 아이들은 재미를 위해 산다고, 지루한 건 절대 참을 수 없기에 그렇게 끊임없이 재미를 찾는 행위(?)를 한다고 한다.

개학 첫날엔 방학 보낸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했다. 방학이라고 별다를 게 없는 일상을 보낸 탓에 내 얘기는 늘 비슷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좀 떨리기까지 했다. 여느 때와 다른 걸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얘기에 창을 등지고 서있던 선생님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선생님은 어째서 내 얘기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저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내가 했던 얘기는 대도시 친척 집에 가다가 우연히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였다. 도로를 무단 횡단하던 아저씨가 달려오는 버스에 치인 장면은 너무 놀라웠고, 무서웠고... 방학 내내 겪은 그 어떤 일보다 생생하고 선명했다. 면 소재지까지 나가야 길을 오가는 차를 볼 수 있는 깡촌 마을 어린아이한테는 분명 놀라운 장면이었지만, 대도시를 쉽게 나다니는 어른인 선생님한테는 별스럽게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그 당시 난 알지 못했다. 나의 기대와 전혀 다른 선생님의 반응에 난 마음이 상했고, 그 탓에 그날 선생님의 그 표정과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감정이 무뎌진다는 말과 같은 의미일까? 웬만해선 놀라지도 않고, 크게 웃을 일도 줄어드는 것 같다. 애써 재미를 찾는 일 따위는 하려고 들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감성을 깨우라고 매일같이 시위한다. 쉬이 깨나지 못한 감성은 잔소리가 먼저 나온다. 그냥 “보통걸음”으로 걸으라고, 그 보통걸음이 어떤 건지 시범까지 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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