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용 공주 주재

심각한 주차난 해소를 위해 인근 학교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바꾸겠다면 여러분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인가?

어른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수라는 이유로 어린 학생들의 행복할 권리를 빼앗는다면 이는 횡포이자 폭력이다. 내 이익만큼 상대방의 이익도 존중돼야 공정한 사회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상호 존중과 소통에 기반이 없는 위험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나는 언제나 옳고 정의이며, 타자는 틀렸고 불의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만 존재한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에 함몰돼 아군과 적군만 있을 뿐이다.

왜 이 지경이 됐을까? 단언컨대 정치인들 탓이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진영논리를 부추겨 반사이익으로 표나 얻으려는 얄팍한 수작이 총선을 앞두고 심해지고 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국민들도 문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익명성 뒤에 숨어 무차별적으로 문자 폭탄을 뿜어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조국(曺國)들로 넘쳐나는 사회,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만들어지고 있다.

대통령과 청와대, 집권여당과 정권 실세들도 국민 갈등을 조장하고 방조하고 있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은 온갖 특권과 특전·특혜의 화신인 조국을 감싸기 급급하다. 조국 부부의 뻔뻔함에 국민들이 박탈감과 허탈함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외려 조국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는 대통령. 공사를 구분 못하다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더니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한다며 맹목적인 지지층의 목소리만 듣는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심에 귀 막고 눈 감으면서 최순실에 놀아났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다는 쓴 소리도 새겨야 한다.

조국 아니면 검찰개혁을 할 수 없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살아 있는 권력에 엄정하라’고 해놓고 정작 산 권력에 손을 대자 ‘날 뛰는 늑대’라며 적폐로 몰아 수족을 자르고, 공소장까지 감추려 하고 있다. 국민의 알권리를 무시하고, 북한의 인권에는 침묵하면서 인권(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을 운운하니 가히 ‘소가 웃을 일’이다.

‘국회증언감정법' 규정은 노무현 정부시절 도입된 것으로, 비공개 방침을 밀어붙인 것은 국민의 참여를 막기 위해서다. 다가올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할지, 혹은 심판할지 결정하는 데에 꼭 필요한 정보여서 기를 쓰고 막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가 ‘깨어있는 시민'의 참여로만 가능하다 했는데, 문재인 정권은 ‘깨어있는 시민'을 두려워한다는 비판을 예사로 들어선 안 된다.

인(人)과 민(民)이 없고, 공(公)이 없기는 김정섭 공주시장도 마찬가지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공포 속에 대규모 행사를 개최해 된서리를 맞았다. 전염병이 우려되는 마당에 수백 명을 불러 모아 놓고 ‘시민안전’을 기치로 내건 국제안전도시 선포식을 가졌으니 아이러니다. 연두순방(시민과의 대화)도 중단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과의 접촉으로 전염병 위험에 노출된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정례브리핑 또한 강행 의사를 밝혔다. 보도자료 배포를 통한 기사화로도 충분하지만, 시민의 알권리 충족을 이유로 들었다. 시민안전이라는 공공의 이익보다 자기를 들어내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개인적인 욕심을 우선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시민의 안전보다 ‘보여주기 식’의 자기 자랑과 치적 자랑을 우선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지 과하면 독이 된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나’와 ‘내편’에 함몰돼 있다. 사람은 있으되 내 사람만 있고 국민은 없는 게 지금 정치의 현주소다. 국민 전체를 위한 공익보다 단순히 나와 내편을 위한 사적 이익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촛불을 들었던 3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고, 경제는 사상 최악으로 곤두박질 쳐 ‘IMF는 이도 안 났다’는 아우성이 빗발치는데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이게 정말 나라다운 나라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건용 기자 lgy@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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