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문화재단지 전경.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을 비롯하여 전통가옥 등 옛 생활상을 재현해 선조들의 생활상은 물론 수몰민의 눈물이 담긴 대청호의 기원까지 유추할 수 있다.

 

 

#. 대청호의 과거를 알려주는 문의문화재단지
대청호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문의문화재단지는 지난 1980년 대청댐 건설을 계기로 1992년부터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총 3만여 평의 대지 위에 조성됐다. 이곳은 지역 내 유·무형의 문화재 등을 수집·전시함으로써 인류문명의 발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재현하고 조상의 삶과 얼을 되살리고 배우기 위한 역사의 산교육장이다.
문의문화재단지의 숨은 이야기는 문의문화재단지 입구에서부터 만날 수 있다. 문의문화재단지 주차장 주변을 살피다 보면 커다란 기념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기념비는 대청댐을 위해 수몰된 마을로 인해 문의문화재단지가 생겨났음을 알리는 ‘수몰유래비’다. 담담하면서도 아쉽고,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대청호의 숨은 이야기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물꼬를 터 준다.

 

초가삼간, 대장간, 솟대 등에서 선조들이 살았던 마을형태를 보여준다.

완만한 경사를 따라 문의문화재단재의 들어서면 ‘민속촌’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문의민가, 낭성민가, 주막집, 놀이마당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옛 조상들이 살았던 마을형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과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흙벽돌 초가삼간 토담집이 옛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단지 위로 올라가다보면 중부지방에선 보기 드문 돌너와집(부용민가)이 자리하고 있다. 돌을 판판하게 기와처럼 만들어 지붕을 이은 집으로 이색적인 형태의 지붕을 갖고 있다. 민가라 할지라도 어느 것 하나 뒤처지거나 튀는 것 없이 소박한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가옥에는 그 건물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용하던 생활소품이 전시돼 있어서 현장감이 더한다. 아울러 가옥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쉽게 돌담을 발견할 수 있다. 돌을 하나하나 이를 맞춰 쌓아놓은 담이지만 절대 높이 쌓아놓지 않는 우리 조상들의 돌담에서 여유와 인정이 느껴진다. 딱딱한 돌로 쌓았음에도 곡선의 미가 느껴진다.

양반가옥 안에는 관람객들이 단순히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의·식·주를 기본으로 한 민속예술과 일상에 필요한 도구 등을 주제별로 자세히 분류, 사진과 함께 그 쓰임과 의미 등을 밝혀 이해를 도왔다. 양반가 뒤편에는 효 문화의 상징인 시묘(侍墓)살이용 여막(廬幕)을 가묘와 함께 조성했다. 묘소 가까이에 지어놓고 상주가 탈상할 때까지 거처하는 임시거처인 여막 안에는 전통상례와 제례절차안내문, 이와 관련한 사진과 제사상, 상제 모형 등이 전시돼 있다.

 

문의현의 객사였던 문산관(왼쪽), 문의현의 현령들을 기록한 비석들

 

위쪽으로 올라가면 1666년 문의현 객사로 건축된 후 대청댐 수몰로 지금의 위치로 옮긴 문산관(충북유형문화재 제49호)을 만날 수 있다. 문산관에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하여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했을 뿐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영조대왕태실 조성을 기록한 지방유형문화재 제70호인 영조대왕태실가봉의궤를 비롯해 지역 내에서 수집한 유물을 전시한 유물관과 신라, 백제와당 등 시대·종류별 기와를 전시한 기와전시관도 있다. 전시관 앞뜰에는 고려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문산석교가 복원돼 있다.

#. 수몰민의 눈물이 담긴 대청호
1960년대 후반, 해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 물을 안정적으로 사용하고자 대청다목적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당시 금강유역은 연중강수량의 3분의 2가 여름철 3∼4개월 집중됐다. 대청댐 지점의 빗물유입량은 연평균 32억㎥이나 최소치와 최대치가 약 8억㎥과 49억㎥의 극심한 차이를 보였다. 가뭄과 홍수피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치수대책의 일환으로 대청다목적댐 개발 계획이 설립됐다.

 

수몰유래비

 

금강유역의 물 자원개발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는 1967년 금강유역조사사무소가 설치되면서 시작됐다. 금강유역조사사무소는 금강유역의 수자원 종합개발계획에 필요한 제반조사를 5개년에 걸쳐 면밀히 수행했고 1972년 2월 금강유역 수자원 종합개발에 관한 최종보고서를 제출, 대청다목적댐 건설을 건의했다. 댐의 위치로는 수통과 옥천, 대청, 명천 등 여러 댐 후보지점에 대해 개발계획을 비교·검토한 결과 현재의 자리가 결정됐다. 당시 폭발적으로 인구가 늘어난 대전과 청주에 생활용수 공급이 최대과제로 부각될 것으로 점쳐졌던 탓이다. 또 금강 중·하류에 있는 강경·논산지역에 댐 건설 없이는 관개용수 공급 부족 등의 문제가 예상되면서 현재의 대덕구 미호동에 수문을 건설, 인공호수를 만드는 것으로 결정했다.
5년 8개월이라는 대공사를 거쳐 1980년 12월 완공된 대청다목적댐은 높이 72m, 길이 495m의 본댐과 용수조절을 위한 역조정지, 3개의 부댐으로 구성됐다.
대청다목적댐의 효과를 살펴보면 우선 용수효과를 들 수 있다. 대전, 청주 등의 충청권과 전주, 군산, 이리를 포함한 전북권 지역의 생활·공업용수 공급원으로서 절대적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청주지구, 금강 하류, 만경강 지구에 관개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게 됐다. 다음으론 홍수조절 편익이다. 금강 유역은 하절기 집중강우로 인해 매년 홍수가 반복,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어 왔고 경제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대청다목적댐 건설로 홍수피해가 크게 경감됐다.
아울러 대청다목적댐은 연간 2억 5000만kw의 전기를 생산한다. 연간 벙커C유 30만 드럼의 유류대체효과를 기할 수 있어 외화절약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첨두부하발전(peak load plant)을 담당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전력공급에 크게 공헌할 수 있게 됐다.
이 외에도 댐 하류부의 상시유량을 증가시킴으로써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라 오염된 수질을 정화시키고 금강하구로부터의 염수역류를 방지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한다.
이처럼 다양한 혜택을 제공하는 대청다목적댐이지만 댐 건설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있다. 대청다목적댐 건설로 충남·북 4개 군, 2개 읍, 11개 면, 86개 리 등의 광대한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된 것. 수몰지만 1447만 528㎡(충남 515만 6469㎡, 충북 931만 4058㎡)에 달하며 이주민은 4075세대, 2만 6178명에 이른다. 수몰로 말미암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곳 주민들은 자유이주를 원칙으로 했으며 집단이주를 희망하는 주민에게는 경기도 남양간척지와 충청남·북도 집단 취락지를 조성해 이주시켰다. 집단이주로는 남양간척지에 700세대, 공단이주가 350세대, 집단취락지 이주가 720세대로 모두 1770세대이며 나머지 2305세대는 친척이 있는 지역이나 새로운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이주했다.

글·사진=조길상 기자 pcop@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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