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십수 년 전 미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돌아온 친구가 말했다. 갈 곳이 없다고 이 밤, 나를 위로할 곳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 젖먹이 아가를 집에 두고 나온 터라 멀리까지 가긴 어려웠다. 나는 차를 몰아 도시 불빛이 없는 곳으로 갔다. 어두운 농로를 따라 한참을 운전했지만 위로할 만한 곳을 찾기는커녕 둘이 힘을 합쳐 후진, 전진을 하다가 헤어졌다. 나는 그날이 미안해 책임감을 가지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기막힌 달빛 아래 나만의 호수를 찾아냈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깊은 밤, 좁은 다리 위에서 방랑객이 비틀거릴 때,
나는 너를 본다.
이따금 모든 것이 침묵에 쌓인 조용한 숲속에 가서
나는 너를 듣는다.
-괴테의 시 ‘연인의 곁’ 中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영화 ‘클래식’에서 예쁜 손예진이 괴테의 시를 읽어나가는데 나의 호수와 느낌이 같았다. 감정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법이라지만 영화와 시와 장소는 하나처럼 다름이 없었다. 알고보니 클래식은 이곳 어딘가에서 찍어졌다. 4월 초면 할미꽃이 더덕더덕 피어나서 ‘할미꽃 방죽’이라 불리는 길이다. 높이 올라서 보면 어미노루와 새끼노루가 달리는 모습같다고 해 ‘노루벌’이라 불리기도 하는 곳이다.

갑천은 태극을 그리며 돌아나가다가 느려져서 물이 넓게 고이고 아홉 마리 봉황이 산다는 구봉산 기암절벽은 적절하게 막아 착시처럼 호수가 돼버리는 곳이다. 대한적십자 청소년수련관으로 쓰이던 장소로 가는 작은 다리 한 가운데 차를 세우면 그제서야 비로소 나의 호수가 완성된다. 시간은 새벽이 오기 전 5시다.

어슴푸레 새벽녘에 달이 뜬 날도, 별이 뜬 날도,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실패없는 호수는 울기에도 웃기에도 기가막힌 곳이다. 2018년 대전 서구청은 ‘노루벌 구절초와 반디의 숲 체험원’ 조성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부디 최소한의 터치로 있는 모습 그대로의 할미꽃 방죽을 나를 위해 고스란히 지켜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다. 난간이 없이 낮은 그 이름없는 다리도 노루벌의 일부분인 것처럼 지켜주시길 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