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동청소년문학작가

받아쓰기

신미나

아버지 마침표, 어머니 마침표, 내가 부르는 대로 엄마는 방바닥에 엎드려 글씨를 쓴다 연필을 쥔 검지가 작은 산 같다 나는 받침 없는 글자만 불렀다 공책 뒷장에 눌러쓴 자국이 점자처럼 새겨졌다

여름밤의 어둠은
빛을 밀어낸 지우개 가루
연필 끝을 깨물었을 때
연필심의 이상한 맛을 혀로 느끼듯이
엄마는 자기 이름을 쓰고는 천천히 지워버렸다

▣ 아무리 덩치 큰 소도 가죽 한 장에 덮여 있습니다. 소를 감싸고 있는 가죽에 소주잔만 한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데 소의 눈입니다. 소의 몸 전체는 암흑 덩어리이고 두 눈으로만 빛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어떤 소도 눈물을 흘릴 때에는 빛의 구멍인 눈을 통해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은 소의 내부 암흑의 공간 어딘가에 깃들어 있다 빛의 세계로 흘러나옵니다.

글을 읽지 못하거나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소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입을 통해 말은 하지만, 그 말을 글로 쓸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써 놓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문맹’이라고 합니다. 문맹의 ‘맹’은 어둠이지요. 가죽 속에 덮여 있는 소의 내부와 같이 캄캄한 세계입니다. 마음속에서 맴돌기만 하는 말을 글씨로 쓰는 행위가 캄캄한 몸속에서 빛의 세계로 흘러나오는 소의 눈물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방바닥에 엎드려 딸이 글씨를 쓸 줄 모르는 엄마에게 쓰기를 가르칩니다. 엄마는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을 바짝 움켜쥐고 딸이 불러주는 받침 없는 글자를 받아씁니다. “받침 없는 글자”라는 말에서 엄마의 쓰기 공부가 초보라는 것과, 쉬운 것을 쓰게 하여 엄마의 기를 살려주고 싶은 딸의 마음이 읽힙니다. 공책 뒷장에 눌러쓴 자국이 점자처럼 새겨집니다.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익히면서 그동안 캄캄했던 암흑 덩어리였던 엄마의 내부에 ‘앎’이라는 빛이 스며들어갑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만 맴돌던 글자들이 연필 끝에 이끌려 빛의 세계로 하나하나 풀려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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