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대전새미래초 교사

 

들장미 소녀 캔디, 알프스 소녀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톰소여의 모험, 빨강머리 앤, 은하철도 999, 작은아씨들, 플랜더스의 개... 지난 어린 시절 나를 텔레비전 앞에 묶어 뒀던 만화 영화들이다. 재미와 감동을 준 셀 수 없는 영상들이 조금 뒤섞이면서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우리에게 낯선 이국적인 이름들을 어색해하면서도 색다른 재미에 외우고 따라 불렀던 기억도 있다.

요 근래 들어서는 빨강머리 앤과 작은아씨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져서 다시 사랑받고 있다. 그때는 초록지붕에 사는 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말들이 마음을 울리는 명대사라는 것도 미처 몰랐고, 저작권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작은아씨들의 ‘조’의 말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인 줄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들이 매일같이 입는 옷들이 어린 눈에는 하나같이 예쁜 드레스로 보였고, 쿠키나 케이크, 빵 같은 것을 직접 굽고 만들어서 차와 함께 먹는 일상은 부러움을 넘어서 나도 한번 저래 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다가왔다. 위로 올리는 창문과 다락방, 벽난로 같은 것은 앤이 즐겨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낭만적’이었다.

“정말로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들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가난하다는 게 위안이 될 때도 있어요. 멋진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 상상할 여지가 하나도 없으니까.”

이제야 그가 내뱉은 숱한 말들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다독여 주는 응원의 메시지였다는 걸 깨달았다. 유독 앤의 이런 말들에 우리가 위로를 얻고, 따뜻함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건 아마 앤이 우리의 유년 시절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앤은 우리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호흡하면서 우리를 성장시키고, 용기 내게 하고, 또 저만치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기도 한다.

똑같은 책인데도 세월이 지나면서 읽을 때마다 계속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해를 거듭하면서 성숙해가듯이 이야기도 똑같이 그렇게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알고 보면 이야기는 그대로 인데,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보일 뿐일 테지만.

다양한 매체에 볼 것도 넘쳐나는 세상을 사는 요즘 우리 아이들 예전의 우리와 달리 선택의 고민에 빠져 있지 않나 싶다.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보는 넘쳐나고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에 선택장애마저 겪는 우리에게 오래도록 곁에 두고 함께 할 무언가가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게 책이든 만화영화든 무엇이든 간에. 그 특별한 친구는 먼 훗날 어른이 된 후에도 지금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목소리로 속삭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앤이 또 어떤 말들로 다가올까 궁금해 하면서 ‘빨강머리 앤’을 기꺼이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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