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턱 초록으로 물든 대청호. 노랗고 하얀 자태를 뽐내던 꽃들의 무대가 지난 뒤 호수엔 초록 섬들의 하모니가 펼쳐진다.

 

[금강일보 조길상 기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신록이 짙어지고 구김살 없는 햇빛이 아낌없는 축복을 쏟아내 자연의 아름다움이 생동하는 참으로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자 수필가인 피천득은 청순하고 생동감 넘치는 5월을 ‘방금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의 청신한 얼굴과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투명한 비취가락지의 이미지, 앵두와 어린 딸기와 모란의 계절일 뿐만 아니라 잣나무의 뾰족한 바늘잎마저 연한 살결처럼 느껴지는 신록의 달’이라고 표현했다. 햇빛도, 바람도 이렇게나 좋은 날, 집에만 있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이런 날, 고민과 걱정은 잠시 뒤로 밀어두고 나들이에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청호오백리길 2구간, ‘찬샘마을길’이다.

 

이현동생태습지에선 시골처럼 정겨운 풍경을 만난다.

 

부지런히 달려 도착한 곳은 찬샘마을길의 시작점인 이현동 두메마을이다. 이곳부터 찬샘마을과 부수동, 성치산성, 찬샘정 등을 거쳐 직동 냉천버스 종점까지 이어지는 찬샘마을길은 10㎞에 달하지만 걷는 길이 심심치 않다. 자연이 늘 그렇듯 기대만큼의 휴식과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주는 까닭이다.

넓게 펼쳐진 논과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한적함에 문득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시골이 연상되는 길을 따라 이현동생태습지에 다다른다. 누군가는 밍밍하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싱겁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드넓은 대지 위를 녹색 빛으로 물들이고 어깨 위를 넘어온 바람을 따라 한쪽으로 머리를 움직이는 자연의 율동은 보는 이의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한다. 잠시 쉬어가라며 손짓하는 듯한 정자에 앉아 눈으로도,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자연의 달콤함을 맛본다. 한시도 멈추지 않는 자연의 시간을 느끼며 그들의 치열함을 본받고자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다음 목적지는 체험마을로 유명한 찬샘마을이다. 이현동생태습지의 신록 가득한 풍경 속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전달받아서인지 발걸음이 경쾌하다. 마치 오랜만에 산책을 나온 강아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니 어느덧 찬샘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

 

신록 가득한 풍경들을 만난다.

 

 

찬샘마을의 풍경은 여느 시골마을과 다르지 않다. 모내기를 준비하기 위해 물이 가득한 논이라던가, 귀조차 제대로 펴지 못한 강아지가 ‘왕왕’거리며 낯선 이를 쫓는 모습들 말이다. 큰 볼거리는 없지만 언제 봐도 정감 가는 시골모습에 또 한 번 미소가 지어진다. 향수 가득한 시골길을 따라 걸으며 부수동을 향해 나아간다. 작은 능선을 가로지르고, 또 다른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양 옆으로 새파란 잎 가득한 키 큰 나무들이 가득 찬다. 이 나무들은 걷는 이로 하여금 마치 ‘개선장군’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이를 환호하는 듯한, 더 열심히 나아가라고 응원하는 것 같은 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다보면 어머니의 품처럼 넓디넓은 대청호가 반긴다. 그 품안에서 어리광을 부리며 잠시 휴식을 취해본다. 그리 높지 않지만 그 가파름을 무시하지 못하는 성치산을 목전에 두고 있는 탓이다.

 

 

해질무렵 찾은 대청호는 연극의 막이 내리듯 붉은 해가 떨어지는 황홀한 일몰풍경을 선사했다.

 

성치산은 해발 200m 남짓의 작은 산이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절대로 쉽지 않다. 경사가 상상 이상으로 험하고 쉬어가는 구간도 많지 않다. 과거 삼국시대, 이곳엔 산성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함락이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이지 않았을까’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 따위를 떠올리며 달달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어렵사리 정상에 도착한다. 그리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선현의 말씀이 틀림없음을 깨닫는다. 산 정상에서 만나는 대청호의 풍경은 마치 바다에 떠 있는 다도해처럼 느껴지며 절로 탄성을 내뱉게 되기 때문이다.

 

대청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마음을 달래고자 세운 찬샘정
찬샘정에서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본 대청호

 

 

이제는 오늘의 여정에 종지부를 찍으러 갈 타이밍이다. 성치산을 오르면서 이미 풀려버린 저질스런 제 육체를 탓하며 조심조심 내리막을 걷는다. 오르막이 심하다는 것은 반대로 내리막 역시 같다는 의미니 길옆의 나무 응원군의 도움을 받아 한 발씩 내딛는다. 더디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남은 코스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거다. 성치산을 내려와 찬샘정을 향해 가는 길도, 찬샘정에서 냉천 버스 종점까지의 길도 앞서 올랐던 성치산길에 비하면 매우 순한 맛이다. 왼쪽의 대청호의 비경을 감상하며 느긋이 걸음을 옮기다보면 종착역인 냉천 버스 종점이 어느새 눈앞에 와있다.

글·사진=조길상 기자 pcop@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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