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성모병원 정형외과 김원유 교수

[금강일보 김미진 기자]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고 새 삶의 빛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하고 값진 일인가. 생명이 빼곡히 들어선 숲, 한 없이 포근할 것 같은 수풀에 가려져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숙명의 세월이 40년이다. 긴장 속에서 숨가쁘게 걸어온 그 길이 지치고 고단할 법 하지만 그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누군가를 마주했다. 대전성모병원 정형외과 김원유 교수의 손길이 오늘도 누군가의 아픔을 보듬는다.

◆의사가 되기까지
‘유쾌한 키다리 아저씨’. 그를 처음 만난 2020년 5월 26일, 그를 이렇게 부르고 싶었다. 의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날카로운 메스가 그의 무기일 것 같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김 교수를 만났을 때, 그의 유쾌한 웃음과 말재간에 모두가 사로잡혔다. 생과 사의 기로에 선 환자를 빛이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의사의 길을 걸은 지 어느덧 40년이다. 그 중에서도 30년을 대전성모병원 교수로 재직하며 지역민의 건강을 지켜왔다. 대전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이기에 지금까지 그가 짊어져 온 노고는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학생실습으로 지금은 없어진 옥천성모병원에 잠시 숙식한 적이 있습니다. 같은 조원들과 대전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옥천성모병원을 자주 오가는 동안 제 자신도 모르게 대전·충청권에 친근감이 쌓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식으로 대전에 자리를 잡으면서 서울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음을 느끼면서 대전에 대한 애정이 쌓여 지금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늘 환자 생각이 끊이질 않는단다. 어릴 적부터 한국의 슈바이처를 꿈꿨다는 그는 천생 의사다. 의사이자 선교사로서 인류애를 실천하는 사람, 그의 모토다. “슈바이처의 봉사하고 헌신하는 자세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죠. 그리고 솔직히 의사라는 직업이 참 안정적이잖아요.”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모태신앙을 품은 그의 꿈이 오직 의사였던 것 만은 아니었다.

“사실 신부가 되고 싶기도 했어요. 의사가 되고 나서도 어릴 때 세례도 받고 성가대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서 신부를 하려고 했었죠. 그런데 당시 마포구에 있던 아현동 성당 신부님이 앞으로 성당에 나오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지만 지금 떠올려보니 의사로서 한 명 한 명의 생명을 지키라는 큰 뜻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인터뷰 중 응급 환자가 있다는 다급한 전화에 그는 바삐 상황을 캐치하고 당장 해야 할 처치를 알렸다. 정형외과 의사, 특히 그 중에서도 어려운 고관절 전문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에게서 뜻밖의 섬세함을 묻어났다. 간단한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하기 위해 직접 PPT를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거다. 그의 발표를 들으면서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는지, 왜 시민들이 그에 대해 큰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고 나서 아차, 싶었다. 환자 한 명 한 명의 케이스를 차곡차곡 기록하고 기억해 둔 그에게 달리 ‘특별한’ 환자는 없을 터였기 때문이다. 그에겐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만 최근 그의 명성을 다시 한 번 널리 알린 환자가 떠올랐다. ‘박선영’ 씨다.

“지난 2016년에 만난 박선영 환자는 낙상사고로 인해 골반 자체가 완전히 부러져 있는 상태였죠. 항상 마약성 진통제를 복용하며 통증을 견뎌야만 했던 환자였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과잉 진료를 하지 않으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한 군데를 집중적으로 재건하는 수술을 진행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부분의 뼈를 최대한 붙일 수 있도록 노력했지요.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난해, 박선영 환자가 2살배기 딸을 데리고 저를 찾아왔습디다. 수술 전에는 걷지도 못했던 환자가 어여쁜 아이를 데리고 오니 마음이 참 따뜻해졌죠. 특히 품에 안은 아이가 제 손녀딸과 나이가 같아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 후배 양성에 힘쓰다
대한민국 고관절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만큼 끊임없는 수술 요청에 숨 돌릴 틈도 없는 나날이지만 김 교수는 진료 뿐만 아니라 후배 양성에도 힘쓴다. 수 십 년간 그가 적립한 경험은 후배들에게 굵직한 이정표다.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늘 같습니다. ‘환자들의 컴플레인을 긍정적으로 들어라’ 입니다. 의사들은 환자들이 어떤 통증을 겪고 있는지를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수술은 짧게 하라는 것도 제 원칙입니다. 수술은 오래 할수록 나쁜 겁니다. 정확하게 문제를 찾고 그것을 해결해 답을 도출해내는 과정은 신속하고 간단해야 합니다.”

이 같은 그의 지론과 철학은 노인환자들에게 더욱 유효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특히 노인환자들을 마주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점점 고령화되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해선 노인에 적합한 치료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인들은 하루만 있어도 상태가 악화될 가능성이 큰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기저질환을 앓고 있어 수술을 하기까지 많은 진료과를 거쳐야만 합니다. 특히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분들이 많아 고관절이 쉽게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하는데 몇 개월 안 가 운명을 달리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병원이 중부권 최초로 노인골절센터를 개소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미 유럽에서는 노인골절에 대한 팀을 꾸리고 24시간 내내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지만 국내에선 그렇지 못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에 노인골절센터를 추진하게 됐습니다.”

보석을 세공하듯 세심하고 화살로 과녁 중심을 맞추듯 정확한 의술을 구사하는 김 교수다. 그는 이를 더 빛내기 위해선 빠른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몸 상태에 맞는 치료법을 판단하는 게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우선시돼야 합니다. 모든 환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고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 하는 상황도 분명 있기 마련이죠. 빠르고 정확한 판단이 없다면 살릴 수 있는 환자도 살릴 수 없게 되는 불상사가 초래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후배들이 나아가야 할 길 위에서 말이다. “환자의 환경을 알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환자의 사회·경제적 상태, 가정환경 등 종합적으로 판단해 치료해야 합니다. 처음 의술을 익히기 시작한 단계라면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전반적인 것들을 다룰 수 있어야 세부적인 것도 잘 하기 마련이죠. 처음부터 한 분야에 매몰되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에게 항상 자연의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뼈는 웬만해선 저절로 붙게 돼 있습니다. 환자의 몸에 필요 없는 조작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거죠. 무리하게 치료 효과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선배들로부터의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고 경험을 바로바로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다시 읽어보면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군요.”

세상은 참 좁은데 아픈 이들은 넘쳐난다. 두 손으로 귀중한 생명을 다룬다는 건 어찌 보면 특권이 아닐까.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사가 가진 특권은 환자의 고통과 즉시 연결된다.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푸는 건 진정한 의료인이 아니라는 것, 의료인으로서의 실존 이유를 숙고해 봐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명이다. 슬기롭게, 또는 바보처럼 모든 이들의 ‘삶’에 몰두하는 김 교수. 그가 있어 대전은 오늘도 평화롭다.

 

김미진 기자 kmj0044@ggilbo.com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