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에 첫 취업과 첫 창업 도전해 모두 실패
두 번째 직장서 現 동업자 만나 ‘도원결의’
도장·열쇠 조각기계 만들고 직접 수주키도
주얼리각인이란 새 먹거리로 해외진출 성공
동업 인연에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강

주재성 ㈜알이디테크놀로지 공동 대표이사

[금강일보 김현호 기자] 소위 좀 ‘잘 나간다’는 기업들에겐 그들만의 무기가 있기 마련이다. 자금력이라든가, 뛰어난 기술력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각자의 그것을 갈고 닦아 한 우물을 파며 경쟁력을 키워나간다. ㈜알이디테크놀로지(대표 주재성·호범석)가 가진 무기는 여타 기업의 그것들과는 결이 좀 다르다. 그들은 우직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분야에 뛰어들어도 우직하게 정면 돌파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게 그들의 무기다.

#. 기계와 친숙하게 된 유년기
주재성(47) 알이디테크놀로지 대표는 대전 토박이다. 그의 집은 그 시절 대전에 사는 누구나 그랬듯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운기와 친숙했단다.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도 좋았지만 경운기를 손질하는 아버지를 어깨너머 보는 게 더 즐거웠다니 ‘될 성 부른 떡잎’이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 녀석이 뒤에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주시하니 아버지 입장에선 얼마나 귀여웠을까. 평소엔 과묵하신 아버지는 주 대표가 경운기에 대해 물어볼 땐 누구보다 선한 웃음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주셨다고 한다. 주 대표는 그렇게 기계와 점점 친숙해졌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아버지의 작업에 작은 훈수까지 들 정도까지 여물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손질하는 경운기를 빤히 쳐다보는 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다른 집 같았으면 ‘위험하니 멀리 떨어져라’라고 했을 텐데 아버님은 일절 그런 말씀을 안 하셨죠. 그렇게 기계에 빠지게 됐죠. 관련 분야가 취업도 잘 된단 소리에 솔깃해 충남대 기계설계공학과에 지원했어요. 학과 특성상 남자들이 득실거리니까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분야를 공부하면서 뛰어난 성적까지 거뒀기에 그의 취업길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다. 1997년 말이 되기까진 말이다.

 

주재성 ㈜알이디테크놀로지 공동 대표이사

#. 첫 직장과 첫 창업
대학교 4학년이었던 1997년 초 주 대표는 같은 과 선배로부터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유난히 취업이 잘 안 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그 땐 선배의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자신이 졸업하는 이듬해엔 취업문이 활짝 열려 행복한 사회생활을 할 것이라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1997년 11월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비보가 타전됐다. 예정대로 이듬해 졸업했지만 어떤 기업도 그에게 손짓을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전공을 살려 버섯포장기를 만드는 대전의 업체에 들어갔지만 곧바로 임금을 받지 못하기 시작했다. 결국 입사 4개월 만에 첫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창업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첫 창업 아이템은 스타크래프트로 큰 인기를 얻던 PC방이었다.

“임금도 거의 못 받았는데 돈이 어디서 났겠어요. 아버지에게 사업계획서를 들고 가 허락을 맡았죠. 제 결혼자금으로 모으셨던 돈을 선뜻 내주시더군요. 그 돈을 밑천삼아 중촌동에 PC방을 열었고 초반엔 제법 장사 좀 됐죠.”

스타크래프트의 영향으로 손님은 늘 끊이지 않았다. 워낙 장사가 잘 돼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진 않았지만 돈 벌 생각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장사했다. 하지만 급속한 기술 발달로 좋은 사양의 컴퓨터가 계속 출시되면서 새 컴퓨터를 구입하는 비용이 만만찮게 들었단다. 여기에 계속해서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매출이 줄기 시작했고 결국 폐업을 피할 수 없었다.

#. 두 번째 창업
다시 구직자로 돌아간 주 대표는 도장기계를 만드는 한 회사에 입사했다. 나름 기술력이 있는 회사여서 배울 게 있었으나 여전히 IMF의 그늘에 짓눌려 가끔 임금이 안 나온 적도 있었다. 그래도 첫 직장보단 나은 환경, 첫 창업의 실패에 쉽사리 사직서를 낼 용기는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이 많이 나가기도 했으나 주 대표는 끝까지 회사에 남았다. 호범석 알이디테크놀로지 공동대표와 함께 말이다. 사실 주 대표는 호 대표와 그렇게 친한 것도, 그렇다고 안 친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워도 충직하게 회사에 남은 호 대표에 내심 호감이 있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저런 사람과 사업하면 든든하겠다’였다. 어느 날 야근하고 있던 주 대표에게 호 대표가 대뜸 한마디 했다. “나랑 같이 창업할래요?”

공동대표 체제의 알이디테크놀로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들의 주요 시장은 도장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배운 기술을 살린 조각기계 제작 분야였다. 막 탄생한 기업들이 겪는 수주 부족이란 문제가 있었으나 나름 충직하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전 회사에서 그들에게 꽤 많은 일거리를 줬다. 그렇게 조금씩 알이디테크놀로지를 키워나갔으나 전 회사가 파산하는 악재가 발생했다. 최대 수주처가 망한 것이다. 알이디테크놀로지의 위기였으나 두 대표의 우직함은 위기에서 빛을 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력을 믿고 자신들이 다녔던 회사를 어떻게든 인수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목표를 위해 열심히 거래처를 발굴하고 키워나갔다. 전 회사를 인수하며 이들의 네트워크를 흡수해 자신들의 판로를 넓혔고 그들의 우직함이란 무기까지 더해져 전국구의 회사로 성장했다.

 

주재성 ㈜알이디테크놀로지 공동 대표이사

#. 전세계에서 입증된 기술력
국내시장에서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으나 이들의 주력인 도장과 열쇠시장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다 이들의 기술력을 미리 알아본 한 업체가 주얼리 각인을 부탁해 왔다. 주 대표와 호 대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조금은 망설였지만 ‘도장이나 열쇠나 주얼리나 똑같이 파면 되겠지’라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발동했다. 도장이나 열쇠는 조각하다 실수하더라도 다시 하면 되는데 주얼리는 재료값이 좀 나가는 것들이라 꼼꼼하게 작업해야 했다. 다행히도 두 공돌이(?)는 의뢰인을 흡족케 했다.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성공하자 도장과 열쇠만으론 성장이 어렵다고 판단해 곧바로 관련 기계를 제작하고 해외로 눈을 돌렸다. 기업홍보사이트에 알이디테크놀로지란 이름과 사업 분야를 올렸는데 신기하게도 영국과 터키 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TV에서 봤던 사이트에 회사를 홍보했는데 진짜 연락이 오대요. 가뜩이나 주얼리 각인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막 만들었던 시기여서 일을 수주하고 아웃풋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어요. 세계에 알이디테크놀로지란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였죠. 현재는 유럽과 미국, 남미 등 우리의 손님이 없는 대륙이 없죠. 지난해엔 77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알이디테크놀로지는 업계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는 입소문이 자자하다. 오로지 한 우물만을 판 우직함 덕분이다. 하지만 주 대표는 절대 혼자였다면 알이디테크놀로지를 지금처럼 키웠을지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호 대표와 동행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단 것이다.
“호 대표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겠죠. 그를 만난 건 정말 행운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직원들도 중요하죠. 전 직원들이 바쁜 업무 속에서 한 숨을 쉴 수 있는 회사 내 공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직원들이 3일의 연차를 내면 하루를 더 붙여서 결재합니다. 알이디테크놀로지만의 장점이랄까요.”

알이디테크놀로지는 한 대기업의 캐치프레이즈처럼 항상 ‘사람이 먼저’다. 그래서 직원들의 얼굴엔 여유가 묻어난다. 직원들의 여유는 알이디테크놀로지의 성장 동력으로 작동한다. 알이디테크놀로지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글=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사진=신성룡 기자 dragon@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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