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김기옥 사유담 협동조합 이사

화가는 신이 났다. 이제 몇 점만 더 그리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가게 된다.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가보지 못한 고향이었다. 고운 하늘과 맑은 햇살을 생각하니 등이 간질간질했다. 이렇게 날을 새면 안 되는 나이였는데 마음이 끝없이 붓을 들게 했다. 그리고 또 그렸다. 새 색시가 신랑 처음보는 날, 분 찍어 바르듯 매만지고 매만졌다. 다 됐다. 잘 됐다.

어려서부터 그림 재주를 타고난 아이는 여기저기 얻어 배웠다. 신동이란 소릴 들으며 배워나갔다. 선전에 나가 ‘청죽’으로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본 스승의 영향으로 다양해진 그림은 동·서양을 넘나들었다. 상파울로에서 이름도 모르는 나라 청년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실력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가는 곳마다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곧 예술의 본 고장 프랑스로 들어가게 된다. 호연지기가 넘치는 화가는 서양 땅이라고 기죽지도 않았다. 캔버스 대신 한지를 쓰고, 먹을 쓰고, 돈이 떨어지면 잡지를 구겨서 콜라주를 했다. 알파벳의 나라에서 거침없이 한문을 휘갈겨 그림처럼 그려내었다. 그 유명한 ‘문자 추상’이었다.

유럽은 참 자유로웠다. 바라봐도 안 됐던 북한도 갈 수 있었다. 화가는 욕심이 났다. 북에 두고 온 큰아들이 너무 사무치게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독으로 갔고 아들과 만날 방법을 찾아 북한대사관에 들어섰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동베를린을 중심으로 유학하고 있던 지식인들이 간첩단으로 조작됐다. 화가는 명단에 있었다. 대한민국은 훈장을 주겠다고 화가를 불러들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1967년 귀국했다가 교도소로 끌려 들어갔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었다.

화가뿐 아니라 많은 지식인들이 걸려들었다. 그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던 화가는 대전교도소에서 멍하니 앉아있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화가는 입에 밥을 씹어 으깨서 형상을 만들었다. 색이 필요하면 간장을 바르고 고추장을 발랐다. 재판 결과는 좋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때 프랑스가 손을 뻗어 화가를 구해줬다. 그렇게 1969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화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도 못했다. 처음엔 살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조국이 괘씸하고 미웠다. 그러다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이 유럽에 알려졌다. 독재에 맞선 사람들의 모습에 감동해 쏟아져나오는 사람들을 그려냈다.

춤을 추는지, 싸우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앉아있는 사람은 없다. 끝없이 그리며 울분을 전했다. ‘군상’이라 했다. 그렇게 20년이 넘어서자 화가는 고향이 그리웠다. 못 가는 것과 안 가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화가는 매일 하늘을 봤다. 그 슬픔이 그림에 들어 유럽이 존경하는 예술가가 됐다.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다. 그러다 1987년 서울에 봄이 왔고 시절이 좋아져 조국은 화가를 초대했다. 맘이 쿵쾅쿵광 뛰었다. 열심히 그려 한국 사람이 이 정도로 잘 살아서 나라를 빛냈다 자랑하고 싶었다. 하소연도 하고 싶었다. 그러다 한국 갈 날 받아 놓고 그림 다 싸서 보내 놓고 갑자기 심장이 멈췄다. 전시 첫 날이었다. 노인은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떠날 인생을 이렇게 열심히 살았다. 몸을 떠난 이응노는 훨훨 날아 영원히 고향으로 날아갔을 걸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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