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작가, 국제펜 한국본부 회원

 

요즈음 우리 집 손자를 바라보노라면 민망해진다. 거리를 걷는 청소년들이나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어린이들을 바라봐도 별로 할 말이 없다. 얼른 다가가 “너희는 다음 세상을 열어갈 희망이란다. 우리의 소망스러운 존재이니 알차게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망설여진다. 그들이 앞으로 열어갈 세상이 어떻게 다가올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는 세상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도 왜 그들이 안 돼 보이는 걸까? 잘 입고, 잘 먹으면서 부족함 없이 쑥쑥 자라는 그들이지만, 성장한 후에 이 세상을 어떻게 열어갈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노파심일까?

예전에 우리가 자랄 때는 못 먹고 못살았어도, 나름 미래가 있었다. 꿈과 희망이 있었다. 어른이면 누구나 어린이의 성장을 관심 있게 지켜봤다. 피붙이가 아닌 이웃 어른도 다가와 “너희는 우리의 미래란다. 꿈과 희망을 갖고 몸과 마을을 닦으며 열심히 공부하면 이 세상을 이끌어갈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북돋아줬다. 그만큼 우리는 어른들에게 희망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니 아이들에게 할 말이 없다. 자당 대통령을 탄핵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자신도 폭삭 망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도 없고, 누구처럼 학교 급식 등 일상적인 시정(市政) 문제에 시장직을 걸다가 쫓겨나는 사람이 되라고 할 수도 없다. 선거에 당선된 지자체장이 그 직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말을 자주 갈아타야 출세하는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누구처럼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제 자식을 위해선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별짓 다하는 사람이 되라고 할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개인 명의 통장에까지 입금하도록 모금해 자기 삶을 챙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정치적 욕심 없이 순수한 NGO를 만들어 정부나 공공단체가 하는 일을 감시하면서 국민을 대신해 몸을 던지는 줄 알게 해놓곤 정계로, 관계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는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열심히 공부하고, 인격을 닦으며 훌륭하게 자라나면서 타고난 적성에 맞게 자기 꿈을 이룬 후엔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남을 배려하면서 이 세상을 밝게 열어 가는 사람이 되라고도 말할 수 없는 세상이 됐으니 참 걱정이다. 그렇다고 ‘좌’든 ‘우’든 확실하게 편을 갈라 자기편을 만들면 되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제 진영만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겨레는 우수한 문화민족이다. 우리만의 사상과 정서를 바탕으로 부처의 자비정신과 공자의 유교사상을 접목시켜 왔다. 근대에 들어선 예수의 박애정신과도 하모니를 이루며 외래 종교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고, 동서문화를 융합시켜 왔다. 뿌리 깊은 가난도 물리치면서 짧은 기간 민주화를 이룩해온 민족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과속 성장, 졸속한 민주화 때문인지 대한민국은 성장통을 크게 앓고 있는 중이다. 천문학적인 돈을 풀어 복지라는 이름으로 그 진의(眞意)는 감추고, 마구 퍼붓는 바람에 국민이 이성을 잃고 있다. 그 근면했던 국민이 미쳐 있다. 정부만 바라보며 목을 길게 늘이고 있다. 옳고 그름은 없고 진중(陣中) 논리만 펼치며 서로 투쟁을 일삼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 서 있는 젊은이들까지 어른들의 부질없는 욕심과 헛된 망상에 그 순수성이 짓밟힐까 걱정이다. 정의감이 훼손될까 걱정이다. 아니, 이미 어른들의 잘못된 논리에 희생당하고 있다. 그들의 미래가 심히 염려스럽다. 예전에는 거리에서 만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바라보면 부러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그들이 안 돼 보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할지 민망스러울 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한 번 뿐인 인생을 살기 위해 성장하는 그들이 자기 성취를 하도록 지켜주어야 할 책무가 어른들에게 있다. 모두가 에디슨이나 링컨, 슈바이처나 이태석 신부처럼은 아니더라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자매와 어울려 우애 있게 성장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국가에 충성하면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그런데 그들의 미래가 불확실하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이제 삶만큼 살았고, 젊은이들은 자기 선택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저 어린이들은 어찌할 건가? 젊은이에게 열어갈 미래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이걸 어찌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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