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덕일 대전중구문화원장

노덕일 대전중구문화원장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지난 6일은 제65회 현충일이었고, 25일은 6·25전쟁 70주년을 맞는다. 필자는 군악 시절 제6회 현충일 행사부터 연주와 지휘를 많이 했다. 이외 외국 국가원수의 방한에 현충원 참배는 기본이었다. 그런 행사에 30여 회 참여했다. 필자가 6월이면 마음가짐을 달리하고 애국하는 마음을 갖는 이유다.

아는 바와 같이 6·25전쟁은 모택동과 스탈린 후원 아래 김일성이 기습남침을 감행한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그런데 이 엄연한 역사가 언제부터인가 점점 잊히고 있는 것 같다. 6·25가 오늘의 역사 교과서에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몇 줄이나 쓰여 있는지는 모르나 우리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 했던 날을….’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 노래’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조국의 원수요 민족의 원수다. 우리의 적인 것이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설파했다. 악(惡)의 역사건, 선(善)의 역사건 역사는 역사다. 이에 필자는 당시 유행했던 음악을 통해 6·25를 상기해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가곡 ‘비목’이다. 이 곡은 작사자가 군 생활 중 이름 없는 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보고 쓴 시다. 필자가 교직에 있을 때 6월이면 꼭 가르쳤던 곡이다. 전장(戰場)을 처절하게 묘사한 노래도 있다. ‘전우야 잘 자라’. 유호 작사, 박시춘 곡을 현인이 노래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1·2 악절 가사다. 전우의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상황, 화랑 담배 연기 속에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를 그냥 놔두고 갈 수밖에 없는 처절한 전장의 모습을 그린 노래다. 군가처럼 가요처럼 그 시대 인기 노래였다.

또 있다. 유호 작사, 박시춘 곡을 신세영이 노래한 ‘전선 야곡’이다. 참 가슴 아픈 노래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장부의 꿈 일러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그리워’, 2절에는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속을 달려간다’. 총소리가 자장가라고 하는 용감한 군인의 절규다. 여기에 어머님의 그리움이 묻어있으니 전장은 이랬다. 현인이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도 기가 막힌다. 6·25 때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여동생을 피난지 영도다리 위에서 찾는 한이 맺힌 노래다. 이 모두 전쟁의 비극이다.

또 6·25 이산가족과 생이별한 아픔을 담은 1950년대의 중반에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이재호 곡)’. 이 노래의 주제는 1950년 9월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 이때 퇴각하던 북한군이 애국지사를 비롯한 저명인사 등 무려 8만여 명이 넘는 사람을 납치 북쪽으로 끌고 갔다. 이들을 우리는 납북자라고 한다. 가사에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이 고개가 서울 성북동 의정부 가는 길 미아리고개다. 단장이란 말은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을 말하는데 얼마나 아프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이렇게 보훈의 달에 음악을 통해 가사에 얽힌 이야기로 6·25를 상기해본다. 걸핏하면 어떤 개인의 죽음을 추모제 이름으로 기억한다지만 6·25에 대한 의미는 애써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안타까울 뿐이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