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제 24사단 vs 북한군 제 3·4 사단
포위망 벗기 위한 미군의 노력
지연전 수행으로 UN군 재정비에 기여
윌리엄 F. 딘 소장 포로되는 아픔도

대전 중구 보문산 기슭에 위치한 대전지구전투 전승비. 박정환 기자

[금강일보 박정환 기자] 전쟁의 참화가 삽시간에 대전으로 마수를 뻗친 1950년 7월, 이역만리 낯선 땅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이들이 있다. 바로 미 8군 24사단이다. 이들은 파죽지세인 북한군의 공세를 지연시키면서 UN군이 재기할 시간을 벌기 위한 사투를 벌였다. 북한군에 비해 수적, 화력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개전 초기,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이 7월 3일 이후 한강 이남으로 공세를 이어가자 미 8군은 24사단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오산과 천안·공주 지역에서 북한군과 맞섰지만 최신형 소련제 전차와 수적 열세에 밀려 대전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대전 전투의 시작이었다.

북한군의 본격적인 공격은 7월 19일 새벽부터 시작됐다. 오전에는 대대적인 포격전이 전개됐으며 포격 이후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대전 유성 주둔 34연대 B중대는 갈마동에 있던 대대본부로 이동했다. 이날 오전 가수원 쪽에서도 인민군이 출현했고 10시 30분경에는 금산에서 이동해온 미군 수색중대가 23번 국도를 순찰하던 중 진잠 인근에서 인민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정오부터는 가수원 다리를 통해 갑천을 넘으려는 인민군과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마침내 7월 20일 새벽 북한군은 월평동 방면으로 갑천 방어선을 뚫고 대전 시내로 진입해왔다. 또한 이들은 이미 대전 남방인 금산과 옥천에 이르는 도로를 차단하고 주력을 시내로 진입시키는 상황이었다. 삼면이 포위된 형세가 된 거다. 이에 윌리엄 F. 딘 소장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짐에 따라 결국 이날 오후 3시 경 철수 명령을 하달했으며, 자신도 오후 4시경 대전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이들 앞에 기다리는 건 경부선 세천터널에서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이었다. 미군은 기습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혼란 속 딘 소장까지 실종된 후 진안에서 포로가 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전투가 끝난 뒤 미군은 참전병력 3933명 중 1150명의 손실을 입었다. 세부적으로는 전사자 48명, 부상자 228명, 실종자 874명에 달했다. 대전 전투는 비록 미 24사단의 패배로 끝났지만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킨 덕분에 유엔군이 지휘체계를 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전지방보훈청 관계자는 “전쟁 초반 물밀 듯 진격해오는 북한군에 의해 UN군은 피말리는 사투를 벌이며 재정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미군이 금강 방어선과 대전지역에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국군과 UN군이 소백산맥 일원에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어준 만큼 대전 전투가 갖는 의미는 크다. 오산부터 대전까지의 전투가 없었다면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상륙작전 등의 작전 수립에 차질이 생겼을 수도 있으며 전황은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보다 훨씬 암울했을 것”이라면서 “또 미군이 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전력을 알게 됐다. 이에 미군도 전력을 증강하면서 UN군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박정환 기자 pjh@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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